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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2-15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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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칙령의 날에 대한 러시아 측 사료(史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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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 1,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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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독도인식은
박종효 교수님이
모스크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찾아낸 자료를 글로 쓰셔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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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독도, 독도칙령의 날에 대한 러시아 측 사료(史料) 연구
歷史學博士 朴 鍾 涍
1) 머리말
2) 러시아 해군함 독도발견과 지도 제작
3) 러시아 상인 브리네르 울릉도, 두만강, 압록강 벌목(伐木)이권 획득
4) 러시아 황실청의 브리네르 벌목 사업권 인수와 칙령 41호와의 관계
5) 러시아 해군성 수로지의 독도 인식
6) 맺는말
1) 머리말
독도(獨島)는 한·일(韓·日)간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관계가 아주 깊다. 조선과는 수교 교섭하라는 훈령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푸쨔틴은 극동 러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해로(海路)와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수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으로 거문도(巨文島)와 함경도에 기항하여 한국의 동해안 등을 측량하면서 조선 정부에 수교 요청을 여러 차례 하였으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빨라다호의 호위선(護衛船) 올리부챠(Оливуца)호가 동해에서 1854년에 영불(英.佛)의 지도상에 없는 독도를 발견하고 러시아어로 동도(東島)를 올리부챠, 서도(西島)를 메네라이라고 작명하고 지형(地形)과 위치 등을 기록한 항해일지(航海日誌=Ткачечный журнал)를 1854년에 러시아 해군지(Морский журнал)에 발표하면서 독도는 조선 해안 울릉도에 근접해 있다고 확인하였다.
1855년에 발행된 해군전집(Морской сборник)에서는 한국의 해안을 조사할 때 울릉도(鬱陵島=Дажелет)와 독도(獨島)를 불가분한 도서로 보고 두 섬을 함께 조사하였다.
그 이후부터 러시아에서 발행된 1856, 1857, 1858, 1859년도에 연속적으로 4년 간 러시아 해군전집에서도 울릉도 다음에 항상 독도에 대한 면적, 위치, 생태계 등의 조사기록을 자세히 게재(揭載)하고 울릉도를 기점으로 독도와의 거리를 측량하는 등 사실상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보았다. 그리고 동해에서 러시아 군함의 해상 항로(航路) 표시의 기준으로 삼았다.
한편 빨라다호는 1854년에 한국 동해안을 측량하고 부산, 울산, 원산, 울릉도, 독도 등의 수심(水深), 조류(潮流), 지형(地形)을 제작해 1857년과 1858년에 각각 ‘한국동해안(韓國東海岸)지도’라는 명칭으로 발행하였는데, 또 그 지도안에 바로 독도를 위치시켰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지도는 현대적인 측량술에 의해 제작된 세계 최초의 ‘한국동해안 지도’가 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러시아가 1860년부터 두만강 넘어 연해주(沿海州)까지 영토를 확장해 한국과 국경을 같이하고 동해에 러시아 함대가 출현해 항해하면서 일본은 동해상에 있는 울릉도에 군사 전략적인 관심을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울릉도에 그리고 러·일전쟁(1904-1905) 때도 울릉도에 러시아 함대를 감사하기 위한 기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독도를 러시아 올리부챠호가 처음 발견하면서부터 울릉도와 연계시켜 부속 도서로 본 인식과 또 러시아인 브리네르의 울릉도 벌목 이권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반포와 관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여러 국립문서보관소의 고문서(古文書), 출판물, 자료집을 참고로 러시아가 독도를 발견한 1854년부터 현재까지 독도를 실제 어느 나라의 도서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밝히 보고 칙령 41호의 반포에 대한 관련성도 살펴보는데, 역점(力點) 두고자 한다.
2) 러시아 해군함 독도발견과 지도제작 사건
러시아가 일본 및 중국과 수교를 체결하기 위해 푸쨔틴(Путятин Е.В.)제독(提督)을 특사로 1852년에 <팔라다Паллада)>호로 파견한 동기는 1852년 3월 4일 동부 시베리아 총독(總督) 무라비요프(Н.Н.Муравьёв)가 해군성(海軍省)에 보낸 정보에서, 미국(美國) 정부는 2개 팀의 무장 탐험대를 아시아 연안에서부터 베링해협(Bering strait)까지 경제성(經濟性)을 조사하고 일본(日本)을 개항(開港)시키기 위해 파견(派遣)한다고 하였다.
사실 미국(美國)은 당시 캄차트카(Камчатка)와 연해주 여러 지역에서 수백 척의 포경선(捕鯨船)이 작업을 하고 있어 포경선의 수리(修理)와 식료품 조달을 위해 일본의 개항(開港)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에 1837년 그리고 1846년 두 차례 걸쳐 개항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여 이번에는 페리(Mathew G. Perry)제독(提督)을 사령관으로 10척의 전함과 2,000여 명의 병사를 보내 무력 개방을 계획했다.
이 정보를 받고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 I)는 페리에 의해 일본이 개방되어 미국과 서구열강이 먼저 일본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면 터키(Turkey)문제로 흑해(黑海)에서 러시아와 적대적(敵對的)인 관계에 있는 영.불(英.佛)의 함대가 전략적으로 극동 러시아를 겨냥한 전초기로 일본의 항구를 사용할 가능성을 염려하게 되었다.
러시아도 그동안 일본과 수 차례 통상문제와 쿠릴열도와 사할린 국경 문제를 협의하려고 시도했으나 일본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번번이 실패하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미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바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특별위원회에서 청.일 양국의 개항과 수교 교섭을 위해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세계 일주 여행에 경험 있는 해군 제독 푸쨔틴을 1852년 5월 19일 극동에 파견하였다.
푸쨔틴은 아직 개척단계에 있는 극동 지역의 해상지도를 작성하는 데도 많은 경험이 있어 적임자로 보았다. 푸쨔틴의 부관은 해군 대위(大尉) 뽀시예트(К. Н. Посьет)였으며 비서로는 외무부 대외 통상국 계장이며 소설가인 곤차로프(И.А. Гончаров)였다.
그리고 통역관으로는 외무부 고쉬케비치(О.А. Гошк- евич)와 또 북경(北京) 주재 러시아 정교회(正敎會) 선교(宣敎)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중국어에 능통한 뻬쩨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넾스끼 수도원(修道院) 승원관장(僧院管長) 아봐꿈(Аввакум)이 선정되었다.
먼저 팔라다(Паллада)호는 보스토크(Восток=동양)호와 함께 출발하여 러·미(美)회사 소속(Росси- й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수송선(輸送船) 멘쉬코프(Князь Мень- шиков)와 1851년에 극동에 파견되어 러시아 포경선(捕鯨船)을 보호하고 극동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포함(砲艦) 올리부챠(Оливуца)호를 극동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하여 3척이 빨라다호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푸쨔틴을 파견할 때 러시아 외무성에서는 다음과 같이 훈령(訓令)하였다.
1) 일본에서는 미·일(美·日)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조약 조건을 보고,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 러시아는 최혜국(最惠國) 대우를 보장받을 것.
2) 청국에서는 러시아가 꺄흐타(Кяхта)에서 육상무역권을 보유하면서 영.불.미에 개항(開港)한 5개 항구에서도 동등한 통상권을 획득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 한국과는 청국의 특수 보호국이라는 관계를 고려해 개항과 수교를 서두르지 않기로 하였다.
푸쨔틴은 1852년 10월 19일(러시아 구역 10월 7일) 뻬째르부르크의 크론쉬탓트(Кронштадт) 해군항(海軍港)을 출발해 오랜 8개월여의 항해 끝에 1953년 6월에 청국(淸國)에 도착해 이미 영,불,미에 개방한 5개 항(港)을 러시아에도 개방시켜 줄 것을 교섭하였으나 청국은 러시아에 꺄흐타(Кяхта)에서 육로통상을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상해(上海) 등 5개 항의 개항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푸쨔틴은 한국의 남해안(南海岸)을 돌아 1853년 8월 22일에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도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3~4년 후에나 통상과 쿠릴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등을 포함한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해결하자고 대답해 통상을 거부당했다. 이런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푸쨔틴은 청·일을 번갈아 대한해협을 통해 왕래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일본과 통상교섭 실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 이때 러시아와 튀르키예(터키=Turkey)가 흑해 근동(近東)에서 패권 다툼으로 1853년 10월 1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진책(南進策)에 불안을 느껴 튀르키예를 원조하게 되면서 크림전쟁(Crimean War1854-1856)이 발생하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가 튀르키예를 지원하기 위해 1854년 1월 4일 흑해에 출현하자, 러시아는 2월 21일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푸쨔틴은 크림전쟁 상태를 알아보고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홍콩과 마카오에 극동 해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있어 이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54년 2월 5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항을 출항해 빨라다호를 포함한 호위선 3척이 모두 스페인 지배하의 중립국이었던 필리핀(Pilipins) 마닐라(Manils)로 떠났다. 하지만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 파비아(Pavia)는 영.불의 편을 들어 빨라다호에 출항을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푸쨔틴은 3월에 마닐라를 출항해 영.불 연합함대와 직접 적인 충돌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타타르(Татар=브라디보스토크 앞 바다) 해협(海峽)으로 항로를 정하면서 3척의 지원선에 각각 다른 임무를 지시하고 집결지로 지도상에 조선 남해안 해상도서(島嶼)인 거문도(巨文島=주:영국은 해밀턴(Hamilton)으로 호칭)를 지정하였다.
그리고 푸쨔틴은 호위선(護衛船) 3척에 대하여 각각 명령하기를, 멘쉬코프호는 상해(上海)에 기항하여 그곳 우체국에서 빨라다에 온 편지들을 수거한 후 한국의 하밀톤(=巨門島,)에서 빨라다호와 합류하고, 보스토크호는 유규(琉球列島=오끼나와)에 있는 미국 함정의 저탄장(貯炭場)에 들려 당시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미국의 페리(Matthew G. Perry)제독의 일본과 통상교섭의 진행 상황을 알아보고 거문도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올리부챠호는 타타르(Татар) 연안으로 출항하여 아무르(Амур=흑룡강) 탐험대장과 연락을 취하고 크림전쟁에 참전한 영(英). 불(佛)연합 함대로부터 캄차트카의 방위를 위해 뻬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로 향하였다.
이렇게 러시아 함대의 집결지로 거문도(巨文島)를 선정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홍콩과 마카오에 기지를 두고 있는 이들 동양함대의 추적을 피할 수 있고, 일본과 청국을 왕래하는 항로인 조선 반도 남해안에 있는 조선 해협(大韓海峽)의 관문(關門)에 있어 식수와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1854년 4월 2일 거문도 해안에 팔라다호를 위시한 멘쉬코프호와 보스토크호가 집결하여 7일까지 2일과 4일 두 번에 걸쳐 도서의 전략적인 가치를 조사하기 위해 해군 공병이 상륙하여 거문도를 측량하였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떠나 부활절(復活節)을 보낸 후 팔라다호는 극동지역에 필요한 부동항(不凍港)을 구하라는 동부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의 요청으로 4월 20일 ~ 5월 11일까지 21일간 한국 동해안을 부산(釜山)에서 두만강 하구(河口)까지 측량기로 실측(實測)하였다.
현대 같으면 정부의 허가 없이 외국선박이 입항해 상륙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타국 영토에 대한 측량은 국제법 위반행위였으나 당시 한국은 군주정치(君主政治)로 군사제도도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도서는 무방비상태로 있게 되어 거문도(巨文島)에 팔라다호가 최초로 한국에 상륙한 러시아 함정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올리부챠호는 푸쨔틴의 명령을 받고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던 중에 1854년 4월 18일 당시 유럽 국가들의 지도에 없는 독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일본 서해안(西海岸)보다 독도가 한국 동해안(東海岸)의 울릉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을 올리부챠의 함장(艦長) 해군대위(海軍大尉) 나지모프(Назимов)는 항해일지에 발견 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에 남기면서부터 러시아에서는 독도가 한국영토라고 인식(認識)하는 선례(先例)가 되었다.
(본문:1854년 4월 18일(러시아 구력 4월 6일) 12시 바람을 가로질러 좌측으로 선회, 함정 내 수위 4.75인치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나 이제 명확해졌다. 이 두 개의 각진 바위는 약 300싸젠 (약642m) 떨어져 있으며 이들 바위는 동남동, 서남서로 서로 위치해 있고, 서쪽 바위는 북위 37도 13분, 동경 131도 55분에 있다. 이들 중 서쪽 높은 바위섬은 메네라이로 명명하고 동쪽 섬은 올리부챠라고 하였다.)
사령선(司令船) 빨라다호는 당시 가장 좋은 지도로 알려진 아담 끄루젠슈테른(Иван.Ф. Кр-узен -штерн)지도와 영국 해군에서 사용하는 한반도(The peninsula of Korea)지도를 비교해가며 동해의 오류(誤謬)를 수정하고 특히 연안의 경도의 오차(誤差)를 정정하고 있었다. 그때 올리부챠호로부터 독도를 발견했다고 보고받은 푸쨔틴 제독은 조타실에 근무하던 세르게예프(Сергеев) 중령을 독도 현지에 파견해 정오(正午) 12시에 가장 잘 보이는 시간에 제도하라고 지시하였다.
세르게예프는 독도의 높이와 형태 및 면적 등을 자세하게 조사하였다. 이 지도는 단독으로 1855년 1월호 러시아 해군지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도를 올리부챠호가 발견하기에 앞서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Liancourt) 호가 1849년 발견하고 리앙쿠르 바위(rocks)라고 작명하였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출판물에서 1854년 러시아 팔라다호(주: 올리부챠호가 발견하였으나 팔라다호가 사령선이므로 팔라다호가 발견하였다고도 한다.)가 발견한 것으로 발표하면서 동도(東島)를 올리부챠라고 호칭하고 서도(西島)를 메넬라이라고 불러 올리부챠 호가 처음 작명한 것을 재확인하였다.
또 러시아가 1856년 재차(再次) 조사한 독도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자료를 보면 올리부챠호가 처음 항해일지에서 기록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1차 발견시(1854년) 자료:
위도: 북위 37도 17분 9초,
경도; 동경 131도 54분 23초
고도: 해발 410 피트
길이: 1609 미터. 수심: 깊다.
2차 조사시(1856년) 자료:
위도: 북위 37도 17분 9초,
경도; 동경 131도 54분 23초
고도: 해발 410 피트
길이: 1609 미터. 수심: 깊다
"다년생 나무는 없으나 잡초가 자라고 있으며 상봉(上峯)은 물새의 배설물로 하얗고 바위로 형성되어 있다. 섬에 접근은 안개 낀 날이나 밤에는 위험하다.“ 러시아는 재차 조사할 때 영국함 호르넽(Hornet)의 다음과 같은 조사기록도 수록했다.
호르넽이 조사한 자료:
위도: 북위 37도 14분
경도: 동경 131도 55분
고도: 해발 410피트
처음 발견할 때 러시아는 한국과 미수교(修交) 상태였으므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전혀 없었으며 일본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이전이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독도를 관찰하고 조사하여 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목측(目測)에 의해 수제(手製)로 그린 지도(地圖)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측량술과 지도 제작술이 발달한 영,불.러 등에서 제작한 지도가 세계 지리학계를 선도하고 있었으므로 곧 표준적인 지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무인도(無人島)는 전통적(傳統的)으로 영토주권이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에 있으면 가까운 나라에 주권이 있다고 보았다.
러시아의 독도에 관한 관심은 주로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해상 항로 표시로 혹은 러시아 태평양 분 함대의 저탄장(貯炭場)으로 사용할 만한 가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조사하여 항상 울릉도 다음에 독도에 대해 지형과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독도발견 당시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게 위치한 한국영토로 인식하고 “조선 동해안 지도”(韓國東海岸地圖)라는 명칭으로 큰 전지(全紙)에 지도를 제작하여 1857년에 세계에서 최초로 러시아 해군성(海軍省)이 발행하였다. 특히 그 지도안에 독도를 특별히 제도(製圖)해 포함한 것은 명백히 한국영토로 간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러시아의 한국 동해안 지도가 발행된 지 18년이나 지나서 일본은 이 러시아 지도를 복사해 발행하였다. 그 동기는 1875년 러·일 뻬째르부르그의 조약에서 러시아에 남(南)사할린을 양도한 직후 한국 동해안의 조류(潮流)는 물론 울릉도, 부산, 울산, 원산항의 수심 등이 자세히 밝혀져 있어 일본이 참고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러시아는 또 “일본도 측량해 일본 서해안에 독도도 위치시켰으나 일본영토와 근접해 있다는 말은 없다.
독도
러시아에 앞서 프랑스 리앙쿠르호가 1849년 독도를 발견하고도 지도를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제작한 이 1857년의 대형<한국동해안 지도>에 포함한 독도지도는 세계 최초의 지도가 되었다. 무인도였던 독도도 조선 영토에 인접해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사실상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한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3) 러시아 상인 브리네르 울릉도, 두만강, 압록강 벌목(伐木)이권 획득
1895년 10월 8일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시해(弑害)된 후, 왕실의 경비병은 일본인으로 바뀌고 친일파(親日派)로 구성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대한제국 정권을 장악(掌握)하였다.
이 왕비 시해 사건으로 러시아 대리공사 웨베르(Вебер К.И.)와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 Herace Newton,주: 의사로 청국에 의료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조선에 와 미국공사관에 입사해 있었다)은 일본인들의 야만적(野蠻的)인 행위에 분노해 서로 밀접하게 접촉을 유지하면서 행동을 같이했다.
이런 두려운 상태에서 고종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처음에 미국공사관에 보호를 희망했었으나 미국 국무장관(國務長官) 온리(Olney)는 주한 미국 외교관들을 힐책(詰責)하고 한국에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거나 고종을 미국공사관에서 보호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미국 공사 실이 본국 출장 중으로 공사직무대리인 알렌은 러시아 대리공사 웨베르에게 피신처를 러시아 공사관에서 제공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후 시해 사건 때도 웨베르는 일본에 단호한 태도로 항의하면서 서울주재 외교관 회의에서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에게 궁정(宮廷)에 난동을 야기하고 왕후를 시해(弑害)한 해명과 그 사건에 가담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친일 내각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정변(政變) 이전의 상태로 질서를 회복시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더욱 고종은 러시아의 이런 태도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곧 웨베르는 멕시코(Mexico) 대사(大使)로 발령받아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임 러시아 대리공사는 1896년 1월부터 쉬뻬이에르(А.Н. Шпейер)가 도착하였다.
마침 이런 때에 고종은 자신과 세자(世子)를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896년 2월 24일에는 다음과 같은 밀서(密書)를 러시아 공사관에 전하였다.
”작년 9월부터 짐(朕)을 배신자(背信者)의 무리가 에워싸고 있다. 최근에는 머리를 깎으라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곳곳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배신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짐과 세자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세자와 함께 짐은 이런 위협에서 벗어나려 러시아 공사관에 보호를 청한다. 이에 대해 두 분 공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밤을 이용해 공사관에 몰래 가겠다. 차후 가는 일자를 통지하겠다.”
쉬뻬이에르는 본국 외무성으로부터 고종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회답을 받고 출국을 준비하는 웨베르와 논의하여 고종에게 공사관에 보호처를 제공해 주기로 하였다. 이에 관해 쉬뻬이에르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하였다. 고종과 러시아 공사관과 극비 연락을 취하고 있는 이범진(李範晉,주:후에 법부대신, 주미공사, 주러시아공사 역임)이 전하기를 고종은 2월 11일(주:러시아역, 1월 30일=당시 1917년 혁명이 날 때까지 러시아 달력을 사용했다.) 새벽에 오겠다고 했다. 약속한 대로 새벽 7시 30분 공사관 뜰에 포장친 두 대의 여성용(女性用) 가마가 도착하였다. 가마 안에는 여인 복장으로 변장한 고종과 세자가 앉아있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호받게 되면서 환궁(還宮)할 때까지 약 1년간 그곳에 계셨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호받을 때 러시아는 고종으로부터 몇 가지 이권을 획득했다. 그중 하나가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 울릉도(鬱陵島) 벌목 이권(伐木利權)이었다.
이 벌목이권(伐木利權)은 스위스 태생(胎生)으로 한국에서 쌀을 수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공급하다가 1868년부터 러시아에 이민(移民)해 브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한 상인(商人) 브리네르(Ю.И. Бринер=Briner)가 1896년 9월 10일 1만 5천 루블의 담보금을 한국 정부에 예치하고 20년간 벌목 허가를 획득하였다. 그는 전에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중국과 거래하던 영국인 선박회사에 근무하였던 관계로 해상으로 청국, 일본, 러시아를 왕래하면서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 반도의 두만강 압록강의 풍부한 목재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침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호받는 기회를 이용해 쉽게 벌목 이권을 받을 수 있었다.
고종은 벌목 허가를 내주면서 계약서에 ”벌목 후에 묘목(苗木)을 식목하고 한인에게 유럽식 산림경영 법을 전수 시킨다.”라는 조문을 넣었다. 그 계약서(契約書)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러시아인이며 블라디보스토크 대상(大商)인 유리 이반오비치 브리네르(Юрий Иванович Бринер,주, 미국 허리우드 배우 율 브리너의 조부(祖父))에게 “한국산림회사”라는 상호(商號)로 벌목회사의 설립을 허가한다. 한국산림회사는 20년간 국유지인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의 무산(茂山)지방, 또한 동해에 있는 울릉도(鬱陵島)의 산림사업의 독점권을 갖는다. 이 지역에서 사업을 마친 다음에 한국산림회사는 압록강(鴨綠江) 한국영토의 산림지역을 답사할 권리를 갖는다.”
등이다. 그리고 이 산림회사를 유산(遺産) 혹은 타인에게 양도(讓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와 같이 17조에 이르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1896년 8월 28일 서울에서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 대신 조병식(趙秉式)과 브리네르가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브리네르는 1897년 초에 두만강 좌안(左岸)부터 벌목을 시작하였으나 회사를 능률적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한 많은 자본을 동원할 수 없어 벌목이권을 타인에게 양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4) 러시아 황실청의 브리네르 벌목 사업권 인수와 칙령 41호와의 관계
이 시기에 두만강 넘어 남 우수리 지방에 있는 러시아 국경행정관으로 있던 마튜닌(Н.Г. Матюнин)이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발령(1897,11,24) 받았다. 마튜닌은 전에 국경행정관으로 청국어(중국어), 만주어, 조선어 통역관 3명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러 국경은 물론 한·만 국경 실정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브리네르가 울릉도, 두만강, 압록강 벌목이권인 브리네르 “조선산림회사”를 양도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큰 관심을 가졌다. 만약 조선산림회사를 브리네르가 다른 외국인이나 일본인에게 넘기게 되면 러시아는 극동에서의 국방과 상업에 큰 피해를 감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므로 마튜닌이 뻬쩨르부르그의 여러 저명인사를 설득하고 이해시켜 결국은 러시아 황실청(皇室廳)이 브리네르의 벌목 이권에 관심을 끌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시기에 외무성에서는 니꼴라이Ⅱ세가 만주에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먼저 교두보로 청국의 뤼순(여순(旅順)항을 조차(租借)하여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기지로 결정하였다.
이제 함대사령부와 그 부대시설, 하얼빈-여순항(東淸鐵道=청국 동부철도)철도 부설공사 시공에 막대한 양의 목재(木材)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만주를 합병시키려는 기도(企圖)로 일본으로부터 한·만 국경과 한·러 국경의 방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벌목 이권이 다른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황실청(皇室廳)이 자금출자하여 브리네르의 조선산림회사를 1897년에 약정해 1898년에 인수하였다.
러시아는 이 조선산림회사(주: 브리네르가 받은 벌목 이권의 회사 명칭)를 기반(基盤)으로 대한제국에서는 물론 극동 지방에서도 타국에 이권을 양보하지 않고, 경제를 확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조선산림회사의 상호를 동아시아회사로 변경하여, 이 회사가 대외활동도 하는 민간회사로 러시아 국가이익과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중에 러시아의 벌목 이권을 시기(猜忌)하던 일본이 울릉도 러시아 벌목 이권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청·일 전쟁(1894-1895) 때에 울릉도에서 원산(元山)까지 해저 전신선을 가설해 중요한 교두보(橋頭堡)로 이용했던 울릉도(鬱陵島)에 러시아에 산림(山林)벌채권을 빼앗긴 것은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벌목을 빙자해 울릉도를 해군항으로 혹은 그에 상응(相應)하는 저탄장(貯炭場) 등으로 사용할 것을 경계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서울 일본공사관에서 일본 민간인 하사마(狹間)를 내세워 러시아에 울릉도 벌목 이권을 15년간 20만 달러에 양도(讓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서 대답이 없자 해안을 급습해 약탈을 일삼던 전통적인 왜구(倭寇)의 습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 서울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25평방 마일에 이르는 지역에 아람드리 원시림(原始林)과 희귀목(稀貴木)을 무차별적으로 도벌(盜伐)해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므로 서울 러시아 공사관에서는 한국 정부에 러시아가 획득한 산림 이권의 보호를 요청하고 도벌(盜伐) 방지책(防止策)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인 상태로 있었다.
1898년 5월에 러시아 황실청(주: 궁내부) 자금까지 투입해 브리네르 벌목 사업권을 인수하였으므로 서울 러시아 공사관에서도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外部=외교통상부)와 내부(內部=(내무부)에 벌목금지 대책 수립을 적극적으로 교섭하였다.
한편 러시아 공사관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의 도벌 금지 대책 수립만을 기다릴 수 없어, 직접 1899년 6월에 경상북도 도청의 조(趙)모라는 관리와 함께 서울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쉬테인(Штейн)을 울릉도 현지에 파견해 도벌 실태와 현지 여러 사정을 파악하게 하였다.
쉬테인이 울릉도에 도착해 현지를 답사하고 러시아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울릉도에는 140명의 일본인 남성 도벌꾼과 23명의 일본 여성이 함께 생활하며 도벌을 일삼고 있다”.
러시아 서울 공사관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에 울릉도 현지 도벌 상황과 일본인들의 불법 거주 실정을 전달하고, 러시아 외무성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함대를 파견해 일본인의 도벌을 금하고 도벌꾼들을 울릉도에서 추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 정부는 1899년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 중인 극동함대에 지시하여 순양함 까르닐로프(Адмирал Корни лов)제독 호를 울릉도에 급파하여 도벌 실태를 파악하고 산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였다.
까르닐로프호는 울릉도 해안에 도착해 육지에서 얼마나 멀지 않은 해상에 함정을 은폐시키고 있으면서 넓이가 약 340미터의 좁은 만(灣)에 일본 목재 수송선이 들어와 목재를 일본으로 수송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울릉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므로 도벌꾼과 러시아 해군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일본과 외교적인 마찰이 발생할 것을 염려해 먼저 도벌 방지책을 대한제국 정부와 협의하고 일본 정부에 항의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러시아 정부는 공사관에 대한제국 정부에 다시 적극적인 도벌 방지책을 요청하고 동경주재 러시아 공사 로젠(Розен Р.Р.)에게는 일본인들이 러시아의 벌목 이권을 일본인이 도벌해 가져가고 있으니 일본 외무성에 도벌을 중지시켜 달라고 항의하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 외상도 도벌을 금지 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사실 대한제국 정부는 벌목 이권에 러시아 황실청이 관여하고 있어서 러시아 황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해서라도 그대로 일본인의 도벌을 방치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러시아 측의 적극적인 도벌 방지책에 대한 요구와 항의가 발단되어 내부(內部)에서도 일본의 도벌과 불법 어로행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내부(內部=내무부) 관원 시찰관(視察官) 우용정(禹用鼎)을 단장으로 프랑스인과 일본인을 포함한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지에 파견하여 실정을 엄격하게 조사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899년 울릉도(鬱陵島)에 파견하면서 일본인들의 도서(島嶼) 침탈(侵奪)과 도벌 실태 및 불법어로 행위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우용정 일행의 현지 조사 보고에 기초해 내부(內部)에서는 일본인의 산림 도벌과 불법어로 행위를 적극적으로 방지하고, 영토침탈과 도서,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울릉도를 행정 구역상 독립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설군의청서(設郡議淸書)를 의정부(議政府)에 제출하였다.
의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칙령(勅令) 제41호로 전문 6조로 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여 10월 27일 반포(頒布)와 동시에 신속하게 관보(官報)에 揭載하였다. 그리고 칙령 41호를 대한제국에 주재하고 있는 각 외국공관에 회람(回覽)했다.
칙령 제41호
제1조: 울릉도를 울도로 개정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것.
제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獨島)를 관할 할 것.
제3조: 개국(開國) 504년(1895년) 8월 16일자 (관보) 중 “관청 사항란”내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 505년(1896년) 칙령 제36호 제5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安峽郡) 아래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할 것.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아전의 정원도 갖추어지지 못하고
제반 업무가 처음 만들어지므로 해당 도(島)가 거두어들인 세금 중
에서 잠시 먼저 마련할 것
제5조: 미진한 제반 조항은 본도(本島)의 개척에 따라 차츰 마련할 것
부칙(附則)
제6조: 본 칙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것
1900년 10월 25일,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
이런 칙령 41호가 반포된 이후 남아있는 목재는 대한제국 정부에서 대궐(大闕) 보수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요청을 러시아 산림회사에 해, 울릉도 벌목 이권은 사실상 무위(無爲)로 끝났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인들의 도벌 행위로 인해 울릉도를 비롯한 죽도 그리고 석도(石島) 즉 독도(獨島) 등의 방어를 강화하려고 행정개혁을 시행해 각국 외국공관에 회람시켜 대한제국 영토임을 재확인한 것은 러시아 정부의 도벌 방지 요청과 무관하지 않았다.
5) 러시아의 해군성 수로지와 독도인식
독도는 러시아 올리부챠호가 발견하면서부터 일제강점기와 남북한 분단 이후에 1990년 한.소(韓.蘇) 수교를 체결할 때까지는 제정 러시아 말기와 구 소련(蘇聯)시대에 발행된 정치지도(政治地圖)와 수로지(水路誌) 및 해군전집 등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수로지는 해군성에서 발행하였으나 정치지도는 정부 교통성의 주관하에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최초 올리부챠는 1854년 발견할 당시부터 19세기 말까지는 주로 동도(東島)를 <올리부챠>, 서도(西島)를 <메네라이>라고 호칭하였으나 해군성 수로국에서 1859년에 발행한 해군전집에서는 또 영국함 호르넽(Hornet)이 1855년 발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01년에 해군전집이 아닌 동해<수로지>에 독도를<리앙쿠르>라고만 단독표기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프랑스 함 리앙쿠르(Liancourt)호가 앞서 1849년에 발견해 <리앙쿠르 바위> 라고 호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올리부챠호의 발견에 이어 1855년에는 영국함 호르넽(Hornet)이 발견하였다고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소련의 독도에 대한 표기는 혼란스러웠다.
수로지와 정치지도는 독도에 대한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정치지도에 1900년부터 독도를 리앙꾸르라고 표기한 지도가 있는가 하면 1910-1930년에는 발견한 연도순에 따라 여러 선박의 명칭을 사용하고 맨 밑에 다께시마(竹島)를 4번째로 기록해 놓았다.
즉 4번째로 일본이 발견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본이 목측이 아닌 실제 면적 등을 조사해 기록한 때를 의미한다.
일본도 일본해군(海軍) 수로국(水路局)에서 최초로 1886년 수로지의 발행을 시작하면서 독도를 1886-1894년까지 리앙쿠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897년이 되어서야 수로지 제4권에서 다께시마라고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독도는 리앙쿠르호가 서양 지도상에 없는 독도를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이어서 러시아, 그 다음에 영국이 발견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구 소련(1922-1991)이 다께시마를 4번째 발견자로 첨가했던 것 같다. 소련에서 발행한 정치지도에 독도를 다음과 같이 표기하였다.
1) 리앙쿠르
2) 올리부챠, 메네라이
3) 호르넽
4) 다께시마
앞서 보았듯이 이런 독도의 표기는 러시아에서 처음부터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호칭의 유래를 보면 맨 처음 1850-1890년까지는 올리부챠, 메네라이, 1901년부터는 리앙쿠르로만 표기하다가 다음에는 리앙쿠르, 올리부챠, 호르넷 등을 혼용하여 표기하였는데 1910년 전후에서 다께시마를 맨 밑에 기재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1945년에 발행된 정치지도에는 리앙쿠르 혹은 산호초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구 소련시대인 1962년에 소련해군 수로국에서 발행한 동해 수로지(주:원명 일본해 수로지)는 한국어 발음을 따 러시아어 문자로 죽도(Чукто)라고 표기하고 다께시마라는 일본어 발음 표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 수로지 <제3장 동해안(東海岸)에서 부산까지>라는 제목으로 바로 울릉도 다음에 독도에 대해 기록하였다.
독도의 위치는 울릉도에서 동남동 방향으로 48마일 떨어져 있으며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2분에 있다. 서도(西島)의 고도(高度)는 156m로 두 작은 섬은 바위로 형성되어 식물은 자라지 않고 있으나 동도(東島)의 일부 지역에서 풀이 자란다.
가파른 절벽 밑에 많은 수면 위의 바위에서는 강치가 서식하고 있으며 어둡거나 저녁에는 수심이 깊어 섬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섬에는 담수(淡水)가 있으나 수질(水質)이 좋지 않다.
상주 거주민은 없으나 여름이면 어민이 와 강치를 포획한다. 그리고 동도에 등대(燈臺)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1970년에 소련 국방성 수로국에서 발행한 수로지에는 도서 명칭의 제목(題目)에서 독도를 독도(Токто) 혹은 죽도(Чукто)라고만 표기하였지만, 독도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전부 독도(Токто)로 호칭하였다.
상주 거주민은 없으며 담수는 있으나 수질이 나쁘다. 그리고 1962년 발행한 수로지와 내용은 같은데 독도의 지명을 죽도(竹島)에서 독도라고 개칭하였다는 것이 다르다.
독도를 울릉도 다음 장에 배치하고 독도 다음 장에서는 영일만과 울산만에 대한 기록이 이어진다.
이 당시는 소련 시대였으나 독도에 대한 소속 국가는 물론 독도의 실제 지명을 옳게 사용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좌측(左側) 섬을 러시아어로 독도(Токто)의 동(동도) 우측(右側)은 독도의 서(서도)라고 호칭하여 독도의 지명을 우리와 같이 옳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결정적으로 현 러시아 연방공화국에서 2001년에 처음으로 종전의 소련 시대에 "일본해(동해)의 수로지"라는 명칭으로 발행하던 전통을 깨고 "한반도 수로지"라는 호칭으로 별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독도를 리앙쿠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나 확실하게 한반도 영토에 포함했다.
국제 수로국의 건의로 최초 독도를 발견한 리앙쿠르호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 리앙쿠르를 한국영토로 표시한 것이다. 독도를 한반도 수로지에 기재한 것뿐만 아니라 한반도 소속으로 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독도의 위치를 역시 울릉도를 기점으로 삼고 울릉도 동남동(東南東) 방향 48마일 거리에 있다고 적시하고 작은 두 섬은 서로 1까밸토프(Кабельтов 주:185.2m)간격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하였다.
두 작은 섬 중에 서도(西島)가 더 높아 고도가 157m로 상봉은 멀리서 보면 원통형의 모습이며 수직선의 절벽으로 되었다고 설명하고, 동도(東島)는 서도에 비해 낮은 편이며 상봉은 평평하다. 해수면의 많은 바위에 강치 무리가 살고 있으며 담수는 있으나 수질이 좋지 못하며 상주 거주자는 없다. 여름에 강치를 포획하려 어민들이 모여들며 섬에 상륙하는 부두 시설은 없다고 했다.
비록 독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아니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하고 있으며 울릉도를 거리 측정의 기점으로 삼고 독도를 조사한 것은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6) 맺는말
위에서 러시아 측 국립문서 보관소의 고문서와 여러 출판물만을 참고해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소련 시대 그리고 현 러시아 연방까지 광범위하게 독도에 대한 기록은 물론 한.러 관계사에서도 러시아의 독도 인식을 살펴보았다.
러시아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1854년 한국과 국교 수립(1884년) 이전에 독도가 서양 지도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1857년에 제정 러시아 해군성에서<조선동해안=한국동해안>정치지도를 발행하면서 독도는 한국동해안에 근접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그 지도안에 위치시켜 한국영토로 보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왕비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후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서 보호받을 때 울릉도, 두만강, 압록강의 벌목 이권을 획득하여 결국 이 이권을 러시아 황실청의 자금이 투입되어 벌목 이권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도벌이 심해 1899년 도벌 방지책을 세우려 서울 러시아 공사관에서 울릉도 현지에 가서 보고 대한제국 내부에 을릉도와 그 인근 도서(島嶼) 상황을 전하고 강력한 도벌 방지책을 요청한 대한제국 칙령 41호를 제정하여 공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러시아 해군성에서 제작한 <한국동해안 지도>의 발행과 함께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여러 차례 독도를 조사하였으나 그때마다 제정 러시아의 해군전집, 해군수로지, 소련국방성의 동해(일본해)수로지에서 독도의 위치를 울릉도를 기점으로 측량하였다.
그러므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확실하게 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독도의 도서명은 제정 러시아, 소련, 러시아 연방 등의 여러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또 발견한 연대에 따라 올리부챠, 리앙쿠르, 죽도, 다께시마, 독도 등의 여러 호칭을 사용하다가 1972년도 소련 국방성이 발행한 동해(일본해)수로지에서는 한국과 미수교국으로 적대적인 동서 냉전 시대였지만 한국어 발음대로 독도라고 게재하여 사실상 한국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후 현 러시아 연방정부의 국방성에서 발행한(2001) "한반도 수로지"에는 분명하게 영토표시로 리앙쿠르(주: 현재는 세계 지리학회의 권고로 외국에서 발행된 지도에는 독도의 도서명을 리앙쿠르로 통일)밖으로 선을 그어 한국영토 안에 포함했다.
따라서 독도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은 한국영토로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러시아 울릉도 벌목 이권은 대한제국 칙령 41호를 반포하게 한 동기와도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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