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顯忠日 )을 미국에선 " Memorial Day " 즉 애국선열 들을 " 기억하는 날 " 로 부른다지요.
우리말 사전에.... " 현충일은 충절들을 기리는 날 , 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충성된 마음을 기리고
그 뜻을 되새기기 위하여 지정한 날 " 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오늘 내게 배달된 일간신문 두가지 전체에 현충일에 관한 글 (기사/컬럼/사설등)은 딱 한건 실려 있었어요.
그것도 아래에 첨부한 바와 같이 아주 자그마하게 취급했으니....
우리나라 최대붓수와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양대 종합 일간지가 이럴진대
" 기억하고 기리는 현충일 " 은 이미 " 버림받고 잊어버린 현충일 " 이 돼 가는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6월 한달은 나라에서 정한 "호국보훈의 달 " 이기도 합니다.
매년 봄철 특히 6월이면 여의도에 있는 국가보훈처가 진짜 불철주야 진땀고전 하는걸 보고 고마워들 하지요.
나라위해 목숨바친 수없이 많은 호국영령의 넋울 기리고 , 고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1급 국가사업 이니까요.
이 작은 한반도에 전쟁이 너무 많았지요. 가깝게는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
일제침략에 항거한 독립투쟁 , 병자호란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고려 이전의 북방민족들과의 전쟁 등등.....
우리민족은 수없이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고 , 그 때마다 이름없는 병졸들과 민초들이 나라위해 쓰러져 갔지요.
8.15 광복후 불과 60여년 온세계가 놀라는 눈부신 국가발전을 이룩한 지금도 우리는 전쟁중이고 휴전중일 정도니....
아무튼 이 휴전중 번영도 IT , 철강, 자동차,조선, 건설, 그리고 스포츠 강국도......기본적으로는 ....단군조선이래
영면하신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물론 우리 자손들도 망각해서는 안되겠어요.
각설하고 , 벌써 4년전인 2004년 봄 , 국립 창극단 (단장 안숙선 명창) 을 모시고 미국 4대도시를 돌며
윤봉길의사 일대기인 < 창극ㅡ 윤봉길사 청년시대 > 를 순회공연 했는데 ......Newyork 에서 태어나 자란
고 3 짜리 재미교포 학생 Christina E. Rho가 이 극을 보고나서 써냈던 감상문 일부( 번역문 )를 아래에 소개 합니다.
[ ..........제 마음을 가장 강하게 끌었던 것은 바로 창극의줄거리가 나타내는 교훈과 용기였습니다.
윤봉길의사는 정규 군인도 정부 요원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젊은 지성인으로서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용기와 조국을 위한 투쟁에 나서겠다는 결단은 거사를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거사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 윤봉길의사는 그 당시 백성들이 감히 품지 못했던 꿈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25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그의 조국에 대한 열정은 다른 평범한 한국 백성들의 의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일본군 수뇌들을 처단하려는 위험한 폭탄투척임무 수행요청을 받아들였던 윤봉길의사는
그의 몸을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에 애국심의 기준을 부여하기 위해 그의 영혼을 바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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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三義士)
기고자 : 이덕일
1931년 12월 상해(上海)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의 이봉창(李奉昌)은 도쿄로 건너갔다. 이듬해 1월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일본 육군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일왕 제거에는 실패했으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던진 폭탄에 일본은 경악했다. 그해 10월 이봉창은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서른둘의 나이로 사형당했다. 1932년 1월 중국 국민당 채정개(蔡廷金皆) 장군은 19로군을 이끌고 상해를 침략하는 일본군에 맞서 33일간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해 4월 일본군은 일왕 생일과 상해점령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여는데, 이때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이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사시킨 의거는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아나키스트 계열의 남화한인연맹 소속의 백정기(白貞基)도 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는 중국인 동지 왕아초(王亞樵)가 입장권을 구해 오지 못해 무산되었는데, 국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한일혁명가 구파 백정기 의사'는 '백정기와 윤봉길 두 사람이 이날 같은 장소에서 연달아 폭탄을 던졌다면 식장은 전쟁터와 방불한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윤봉길은 그해 12월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로 가나자와(金澤)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이듬해 상해 육삼정(六三亭) 사건으로 체포된 백정기는 1934년 6월 이사하야(諫早)형무소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순국했다.
삼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부산을 거쳐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는데, 유해 봉환을 주도한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부산역 앞에서 서울까지 각 역전마다 사람들이 운집 도열해 추도식을 거행하니 산천초목도 슬퍼하듯 감개무량하였다"고 적고 있다. 투척직후 일경(日警)이 다른 사람들을 체포하자 '나'라고 외쳤던 이봉창은 그 이유에 대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답했다. 선열들의 이런 높은 도덕적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현충일이다.
역사평론가
기고자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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