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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1-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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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흉상철거와 관련된 문제인과 진보역사단체들의 성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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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 2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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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모스크바대학 박종효 교수님이 보내오신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와 관련된
문재인과 진보 역사단체들의 성명에 대하여'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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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흉상 철거에 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과 여러 진보 역사단체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서 또 하나의 좌파의 역사 왜곡의 사례를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유감스럽다.
사실 홍범도(洪範圖)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功績)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크므로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명망을 폄하(貶下)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특히 홍범도는 여러 무장 독립군 단체들과 연합해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대첩을 이끌었다. 그 후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반격을 피해 많은 대원이 흩어져 중국에 남았으나 1,400여 명의 여러 부대의 독립군은 북상해 국경 근처에 있는 밀산(密山)과 라자구(羅子溝) 지방에 모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에 여러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단일군단으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여서 서 일(徐 一)을 총재로 부총재에는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등을 선임하였다.
이때 더 이상 물러설 퇴로도 없고 식량도 바닥이 났다.
이 소식을 듣고 러시아 이르쿠츠크 파(派) 고려공산당 중앙총회의 대표 김철훈(金喆勳)이 지원하는 오하묵(吳夏默)의 고려혁명군 자유 대대에서 홍범도에게 사람을 보내 극동공화국이 주거지와 생활을 보장하겠으니 알렉세옢스크(주:현,자유시)로 와서 극동지역에 상륙해 있는 일본군을 격퇴하고 다음에 러시아 혁명군과 연대해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제안하면서 자유시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나셨다.
이에 상해파 이동휘(李東輝)의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박 일리아의 사할린 의용대가 오하묵의 자유 대대와 서로 <대한독립군단>의 군권 관리를 놓고 경쟁하면서 불화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때 고려혁명군의 관할권이 공산당중앙위원회 극동공화국 한국과에서 1921년 1월부터 코민테른극동비서국 슈마츠키에게 이관되어 새로 고려혁명군 정의회를 조직하고 사할린 부대와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나셨다. 처음에는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인 홍범도도 무장해제에 대해 반대하였으나 고려혁명군 정의회 측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독립군부대는 물론 사할린 부대의 무장을 다 함께 해제하자고 설득하다가 <대한독립군단>와 사할린 의용대가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보장을 주장하며 거부하자 홍범도와 지청천(池靑天) 부대 그리고 안무 부대는 고려혁명군 정의회에 무장해제를 약속하고 현장을 떠났다.
코민테른으로부터 고려혁명군 정의회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강인한 성격의 그루지아 출신 칼란다리쉬빌리는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1,000여 명 그리고 고려혁명군 정의회(주:자유대대) 300여 명과 함께 29연대장 말라호프의 지휘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기관총과 포로 1,0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과 사할린 의용대를 약 5시간에 걸쳐 무력으로 진압하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런 무력 진압으로 발생한 희생에 대해 고려혁명군 정의회 전권위원 마르트 오홀라가 코민테른 동양비서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사할린 의용대(주:독림군단 포함)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그리고 무장해제는 864명이라고 했다.
이후 무장 해제된 대한독립군단은 극동공화국 인민 혁명군 소속 고려혁명군 여단에 흡수되었다가 1922년 10월 25일 일본과 러시아 소베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북경협정으로 일본군이 철수하자 해산되고 극동공화국은 러시아에 다시 통합되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단> 부총재에서 러시아 극동공화국의 고려혁명군이 되어 자유시 참사에 관한 재판에 배심원(陪審員)이 되었다. 반면에 일본 육사 출신인 지청천(池靑天)은 이르쿠츠크에 개교한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바로 탈출하여 임시정부 독립군 사령관이 되었다.
애석한 일은 이 사건으로 우리 독립군의 대규모 독립운동 작전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다만 홍범도만 1922년 1월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아닌 러시아 극동인민혁명군 소속 국경수비대(고려혁명군 여단, 빨치산)원으로 전향하여 공산당 삼각 모자와 장교 복장으로 레닌에게서 권총과 상금을 수상하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상에서 홍범도와 자유시 참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진보 역사단체에서 육사 교정에 문재인이 세운 홍범도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성명서 3개 항의 요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무장해제에 대한 책임은 러시아 고려혁명군 양 지휘부에 있었으며 홍범도는 무장해제에도 반대했고 진압 작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 일과 부총재 김좌진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독립군단 총재 서 일은 자유시 참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살하였다. 반면에 홍범도는 코민테른이 조종하는 인민혁명군 소속 고려혁명군 정의회 편에서 이 사건재판의 배심원이 되었다.
둘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끈 홍범도 부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적을 인정했다:-
홍범도에 관해서는 자유시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구별해야 한다. 더욱이 홍범도가 쓰고 있는 모자는 물론 복장도 대한독립군 빨치산 복장이 아니고 당시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을 상징하는 삼각 모자에 국경수비대(빨치산)장교 복장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진 육군장교 산실에 공산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복장을 한 흉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셋째: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독립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우리나라 사회주의자의 독립운동은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주창(主唱)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는 물론 독립운동을 이끈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과도 어긋난다.
독립운동이라고 해서 다 같을 수는 없다. 엄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소베트 사회주의 국가의 혁명에 헌신하면서 조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하려던 자들의 독립운동과는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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