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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9-17 18:58
 조회 : 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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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연합뉴스) = 독도(獨島)는 광무(光武)4년(1900년) 10월27일 관보에 실린 칙령 제41호 제2조에 근거해 볼때 우리 영토임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제 기됐다. <br>동국대 임영정(역사교육과)교수는 국립제주박물관이 19세기말 제주의 사정업무 를 담당한 '察理使 李奎遠'전 기념으로 17일 마련한 '이규원 검찰사와 독도의 인지' 라는 특별강연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br><br>임 교수에 따르면 이 칙령은 일본이 주장하는 명치 38년(1905년) 1월28일 죽도( 竹島)의 영토 편입에 관한 각의(閣議) 결정에 의한 국가로서의 영유 의사보다 5년 앞섰다. <br><br>이 칙령은 '군청(郡廳)의 위치는 대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 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事)'로 표기했고 석도가 독도(獨島)임 음 이미 알려진 일이라고 임 교수는 밝혔다. <br><br>임 교수는 석도(石島)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돌섬'이 되는데 당시 울릉도에 많 이 거주했던 전남 고흥지방 사람들의 방언으로 '돌(石)'을 '독'이라고 불러 당연히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라는 주장도 발표됐다고 소개했다. <br><br>또 독도가 울릉군의 부속도서로 편입되는데는 고종 18년(1881년) 울릉도 검찰사 로 임명된 이규원이 이듬해 4월30일부터 5월8일까지 울릉도를 탐사한후 제출한 보고 서와 1900년 6월중순 우용정(禹用鼎) 울릉도 시찰위원이 제출한 청의서(請議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그는 밝혔다. <br><br>이규원은 고종의 명에 따라 울릉도에 상륙, 5월8일까지 섬의 구석구석을 답사했 고 섬을 배편으로 일주한데 이어 성인봉 정상까지 올라 송죽도(松竹島).송도(松島). 죽도(竹島)를 찾고자 했다고 임 교수는 전했다. <br><br>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이도 상거불원 풍일청명 칙가 망견'(二島 相距不遠風日淸明 則可 望見 두섬이 멀지않아 바람 불고 청명한 날 볼 수 있다)'이라고 기록 돼 독도가 울릉도에서 볼 수 있는 시기가 대략 11월로 편서풍이 심하게 불어 해무가 사라진 날 오후에 울릉도의 고지대에서 독도가 아련하게 보인다'는 점과 일치한다고 임 교수는 강조했다. <br><br>한편 이규원 검찰사는 조선 말기 제주도 찰리사와 군무아무대신도 역임했는데 제주도와 조선의 영토지키기에 노력했고 독도에 대한 인지의 폭도 넓었던 것으로 알 려졌다.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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