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일본인 친구들아 안녕?
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13살 문찬흥이야.
너희 선조들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을 때 생명을 걸고 싸우셨던 광복회 어른들이 서울역에서 집회를 하실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광복회 어른들을 대접할 주먹밥 만들기에 참여했었어.
중국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같이 싸웠던 친구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이제 머리카락이 하얀 노인이 되신 어른들께서 과거의 아픔을 생각하며 지금도 서울역광장에서 집회를 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나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어.
2011년 3월 11일 광복회어른들께서 서울역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너희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쓰나미, 방사능 피해를 받고 돌아가시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와 우리 가족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너희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은 용서해주고 하루빨리 다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사람들은 힘을 다해 너희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너희나라 어른들은 독도가 일본 것이라고 해서 돕고 있는 우리나라사람들을 실망시켰지.
너희나라 어른들이 교과서까지 거짓말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잘못 가르치는 것을 보고 오늘은 내가 그동안 조사한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고 싶어서 이곳에 나왔어.
-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에도, 독도는 한국영토라고 했고
- 17세기말 일본 정부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했고
- 19세기 메이지 정부 공문서에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했고
- 일본 내무성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했고
- 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도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결정했고
- 19세기 말 대한제국 정부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히 표시했고
- 1900년 대한제국 칙령41호에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세계에 선포했고
- 1946년 1월 연합국은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라는 군령을 발표했고
- 연합국의 구 일본 영토 처리의 관한 합의서에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규정했고
- 유엔군도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 시켰어
내가 조사한 내용을 너희들도 같이 조사해봐
우리나라 속담에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이 있어.
불이 나면 불꺼주러 올 사람들은 먼 친척이 아니라 이웃사촌들이라는 말이야.
전쟁은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는 무서운 행위라는 것을 핵전쟁의 고통을 직접 당한 너희나라 사람들은 더 잘 알지 않니?
이제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면 너희들이 나서서 사실을 말해서 더 이상 이웃사촌인 너희나라와 우리나라가 서로 싸우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
앞으로는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가 서로 협력하여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웃사촌이 되자
2012.2.22
대한민국 독도학당 수료생 문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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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어달리기
기원전 512년
"너희들이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 모조리 짓밟아 죽게 할 것이다"
이사부의 호령이 울릉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우산국왕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의 땅이 되었다
현대처럼 원동력이 없어 인력과 해풍에 의존해
나룻배에 몸을 싣고 항해하던 시기
동해의 울릉도 독도는 너무 멀었고 바닷길 또한 무척 험했다
매섭게 부는 해풍을 견뎌내는 농작물은 많지 않아
배를 쥐어짜는 배고픔에 노출되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깔따귀 때의 공습 속에서
일본 해적의 약탈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울릉도 독도는
조선시대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섬이 아니었다.
이 돌섬을 처음 사랑한 분은 안용복장군이었다
그는 울릉도 독도가 쇄환정책으로 비워져 있는 동안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어로작업을 하며
한국인을 해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까지 건너가 담판을 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일로 상보다는 벌을 받았던 안용복장군은 다시금 독도로 향했다.
안용복장군의 2번째 도일로 인해
일본의 태정관으로부터 독도의 한국주권은 견고해 졌다.
"내 몸이 죽어서라도 우리 땅을 찾으려던 것인데 귀양쯤이야 달게 당하겠다"
안용복 장군은 전 생애를 바쳐 독도를 사랑한 첫번째 이어달리기 선수였다.
1882년 한국의 미래에 짙은 어둠이 다가오던 시기!
이규원 검찰사는 고종황제에게 울릉도 독도지역에
일본인들이 무단 벌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고종황제는 쇄환정책을 폐지하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울릉도 독도지역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각국 외신들을 모아놓고
1900년 10월 25일 독도칙령을 제정하고 28일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황제로써 한 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당시 울릉도 독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독도를 텃밭으로 삼고 가꾸고 있는 울릉인들의 조상이었다.
고종황제는 일본의 암묵적인 위협 속에서
점점 더 기울어가는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독도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온 몸으로 지켰기에
독도는 살아서 지금 대한민국의 품속에 있다.
고종황제는 목숨을 내 놓고 독도를 사랑한 두 번째 이어달리기 선수였다.
1952년 한국전쟁이 반발했을 때 독도에서는 말뚝전쟁이 있었다.
쌍방간의 전쟁이 아니라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이 자행되고 있었다.
홍순칠대장은 상이군인으로 울릉도에 돌아 온 후
곧 다시 무장을 하고 울릉도 청년들과 함께 독도로 갔다.
울릉인들에게 독도는 국경이 아니라
앞마당이자 곡식이 자라나는 텃밭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서 제주해녀를 데리고 미역을 채취하여 경비를 벌고
일본인들이 올 때면 총을 쏘아 막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독도에서
독도를 지켜낸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경비대의 성공적인 독도정착을 도왔다.
홍순칠대장과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사랑한 세 번째 이어달리기 선수였다.
위의 세분 외에도 평생동안 독도를 사랑하신 분들이 한국에는 많이 있다.
* 1882년 "울릉도를 포기해선 안 될 것입니다" 고종황제께 울릉도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했던 이규원 검찰관
* 1906년 일본이 울릉도를 찾아왔을 때 대형 태극기를 부두에 꼽고 맞이한
심흥택 울릉군수
* 1950년대 독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독도 의용수비대원들보다 더욱 오랜시간 독도를 경비했던
최초의 독도경비대장 박춘환경사와 독도경비대!
독도의용수비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울릉경찰서 구국찬서장!
독도에서 순직한 7명의 경찰!
* 1981년 "단 한 명이라도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
이 말을 실천하였던 최초의 독도주민 최종덕 옹
* 1997년 "역사적 증거물로 독도를 지켜냈겠습니다"
서학자이며 독도박물관 초대관장이셨던 사운 이종학!
* 1998년 뗏목으로 독도의 뱃길을 규명한 장철수 대장과 이덕영선장!
그리고 발해 1300호 대원들
* 2001년 독도지키기 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제의, 이미향
네 번째 이어달리기의 선수는 이제 우리가 되어야 한다.
각 시대마다 선수들에게 제공된 환경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이들은 독도를 능히 지켜냈고 지금의 우리에게 독도를 전해 주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이 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독도를 진실로 사랑하는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탐욕에 기인한 모든 행위는
독도를 향한 한민족의 사랑을 재조명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독도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 각자에게 얼굴이 있고 지문이 있듯이
사람들 각자마다 독도사랑의 방법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국토로 생각하고
동해는 내 집 앞마당이라고 생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