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보겔. /민음사 제공

미국인을 위해 쓴 덩샤오핑(鄧小平) 평전이 미국이 아닌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즈라 보겔(Vogel·84)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쓴 '덩샤오핑 평전'(민음사)은 지난해 1월 중국 본토에서 번역 출간돼 73만5000부 판매됐다. 미국에선 3만부에 그친 이 책이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

21일 기자와 만난 보겔 교수는 "덩샤오핑이 내부적으로는 마오쩌둥이 남긴 유산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만의 통치 노선을 구축하고, 보수파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대담한 개방 정책을 폈다"고 말했다.

12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덩샤오핑 평전'은 덩샤오핑에 대한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중국 전체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변혁기를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지난 연말 중국 내 15개 기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책'으로도 뽑혔다.

덩샤오핑은 세 번이나 권력에서 밀려나 고비를 맞았지만 기어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7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시대를 연 그는 불과 20년 사이에 근대 이후 중국을 지배한,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냈다. 중국 인민을 부유하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을 찾은 것이다. 보겔 교수는 "덩샤오핑은 뛰어난 정치 감각과 지도력으로 문제를 풀어나간 지도자였다"면서 '중국 개혁·개방의 총지배인'이라고 했다.

책은 덩샤오핑이 중국을 이끈 20년을 상세히 설명한다. 소련·베트남·일본·미국 등과의 관계 정리와 개선을 통해 국제 정세를 안정화하는 동시에 자국의 인재를 해외로 보내 최신 학문과 기술을 습득해 오도록 장려했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마오쩌둥처럼 대중에게 경외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중략) 덩샤오핑은 경제 발전이 당의 권위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정확했다. 경제가 빠르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덩샤오핑의 권위는 거의 난공불락이라고 할 정도로 견고해졌다."(514~515쪽)

이 책의 번역 출간에 맞춰 방한한 보겔 교수는 21일 기자간담회에서 "2000년 하버드대에서 은퇴할 때 미국인에게 동아시아를 이해시키는 의미 있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면서 "'중국이 어떻게 강대국으로 올라섰는가'라는 주제로 좁혀졌고 그 핵심은 1978년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간 서양과 중국·일본 문헌을 연구하고 덩샤오핑의 자녀 둘을 포함해 중국인 100여명을 인터뷰하고 책을 썼다. 덩샤오핑의 경제 업적에 집중한 나머지 인권에 대한 접근이 없는 점은 아쉽다.

중국 본토 번역본은 검열로 10% 가까이 수정되는 아픔도 겪었다.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전 당 총서기가 가택연금을 당할 때 눈물을 흘렸다는 부분, 덩샤오핑이 옛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와 만찬 도중 톈안먼 광장을 점거한 대학생들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젓가락으로 경단을 집다 떨어뜨렸다는 내용 등이 빠졌다. 그는 "타협이 필요했지만 그 어떤 책보다 톈안먼 사태에 대해 자세히 썼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지만 보겔 교수는 2011년 '박정희 시대: 한국의 전환'이라는 책도 펴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따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1965년 처음 방한했을 때 한국의 지식인 친구들은 박정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유가 없다'고도 탄식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역사적 역할도 평가받아야 한다. 그는 경제 발전을 위해 뭘 할지 알 정도로 영리했다. 민주주의 억압, 독재 등에 대한 비판에도 그의 리더십이 한국 경제에 미친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이 동아시아 전문가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인자 장성택을 처형한 것에 대해 "김정은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지 아직 알 수 없다"면서 "고모부인 장성택을 제거한 것은 북한 권력층 내부에 풀기 어려운 충돌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넘버원 일본'을 펴냈던 보겔 교수는 아베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에 대해 "미국도 실망했지만 사실은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중국,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이 일본과 대화하는 문을 닫은 데 대해 더 실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은 군사 대국의 열망을 품고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 극우화'를 얘기하니까 일본이 더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에즈라 보겔(Vogel·84)

2000년 하버드대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본과 중국, 동아시아를 연구했다.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소장, 중앙정보국(CIA) 동아시아 문제 분석관을 지냈다. 현재 하버드대 명예교수로 세계적인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 저서로 ‘일본은 아직도 넘버원인가?’ ‘박정희 시대: 한국의 전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