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증 5
Q12 증인은 독도수호대에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하였고,
이 서명운동은 계속 중이며 중단 된 적이 없지요?
A 예.
100만인 서명운동 실패했으니 최대 10만 인 서명운동 해야 하는데
1000만인 서명운동 시작한 것은
처음부터 달성에 관심 없이 언론 플레이를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서명운동은 안내하는 곳 마다
후원해달라고 계좌번호까지 안내했으니
1000만인 서명운동 이용해서 돈 벌려고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8년 동안 모은 서명용지는 11120명으로서
이 추세대로 1000만인 받으려면
한민족 역사보다 더 긴
칠천백구십년 (7190년) 동안 받아야 한다. |
(참조 - 독도수호대가 중단한 100만인 서명운동)
(참조 - 독도수호대의 1000만인 서명운동)
(참조 - 조작된 1000만인 서명운동 서명지 12부)
(참조 - 김점구가 도용하고 날짜를 조작하여 국회에 제출한 독도단체와 흥사단 회의록)
① 독도수호대가 중단한 100만인 서명운동
(수사기록135쪽)에서 보면 ‘100만인 서명운동한다고 언론플레이 해놓고 1만명도 못하고 중단,’과 관련해서 김점구는
‘사실은 100만인이 아닌 1000만인 서명운동이며 현재도 서명운동을 하고 있어 중단된 적이 없다’
며 본인이 한 100만인 서명운동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였습니다.
김제의 열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일주일 전 구미를 방문한 이유는
독도수호대 100만인 서명용지로 서명하고 있는 독도의병대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에 수 천 명씩 서명 받는 것 보고
"우리는 4000명 밖 에 못했는데 올라가서 구미처럼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하고 돌아가서 의문사로 죽었는데 김점구는 그 후 말 바꾸어
신한일어업협정은 잘되었다고 하다가 지금은 판단보류라고 하고
100만인 서명 달성하니까 독도수호대에서 했다면서 모금 운동까지 해놓고
100만인은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점구가 이미 진술한 (수사기록 116쪽)
‘...... 당시 독도수호대에서 진행하고 있던 독도 관련 서명운동을 관광객에게 받아줄 수 있겠냐고 요청하니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처럼 당시에 독도수호대와 독도의병대의 만남은
독도지키기 100만인 서명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김점구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해당 자료는 중복되므로 위증 6 에서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② 독도수호대의 1000만인 서명운동
서명운동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신사적인 표현이자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하는 서명운동은 일정기간동안 해서, 달성된 결과물을 근거로 청원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1% 서명도 받지 못한 것은 청원할 가치가 없는 사안인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명받았다는 0.6%마저도 한 사람이 9075번, 4170번 서명한 조작된 서명이어서 국회에 청원했지만 독도의 날은 제정되지 못했고 그것마저도 4년 뒤에는 0.1%로 줄어든 상태에서 다시 청원에 이용되었습니다.
갈수록 늘어나야 할 서명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었는데도 그 서명자수로 버젓이 청원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회를 우롱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고 박춘환 국제사법재판관의 말처럼
독도의 날을 만들면 일본의 덫에 걸리는 것과 같고
숭례문을 태우고 포장마차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대한민국의 독도에 대한 주장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공격의 빌미를 주어서
대한민국의 독도주장이 전 세계인에게 거짓말로 치부될 것입니다.
최형규 검사는 독도의병대에서 자세한 자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검사로서 심각한 우려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권장하는 듯한 질문을 한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고 있는 검사로서 할 수 있는 질문인지,
국민과 역사 앞에서 재평가 받아야 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