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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3-22 17:13
홍재현은 제2의 안용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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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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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재현은 제2의 안용복인가
작성자 김점구 등록일 2010-03-05
조선 숙종조에 있었던 안용복의 2차에 걸친 도일활동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일본은 월경죄를 범한 안용복의 거짓말을 한국이 원용하고 있다며 안용복의 도일활동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안용복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가 발견됨으로서 많은 부분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안용복과 같은 인물이 몇 명 더 있었더라면 오늘날 독도문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2의 안용복은 없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되는 동안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에 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담판을 짓고 왔다는 홍봉제(洪奉悌)가 주인공인데 홍재현의 다른 이름이다. 홍재현의 도일활동은 아들, 손자로 이어졌다며 “3대가 지킨 독도”라는 말로 전해오고 있다.
1960~70년대 신문, 잡지에 간간히 기사가 나오고, 그의 손자인 홍순칠은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남겨 놓았다.
홍재현의 도일활동은 “울릉도 개척민으로 홍재현이 독도에 갔는데 일본 사람들이 강치를 잡고 있었다. 홍재현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고문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일본에 가서 일본 관헌에게 독도가 한국 땅임을 다짐받고 돌아왔다”로 요약 할 수 있다.
그럼 홍재현의 도일시기는 언제일까?
1976년 5월 23일자 『선데이서울』에 홍순칠과 박영희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홍재현의 도일시기는 기사본문에 1890년으로 되어 있고 첨부된 사진설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1896년이다.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13쪽을 시간대로 살펴보면 20세때인 1883년의 일이고, 본문에 나오는 시기는 1898년이다.
홍재현의 도일시기가 매우 다양한데, 연도별로 보면 1883년(20세), 1890년(27세), 1896년(33세), 1898년(35세)이다.
일본에 갔다면 누구를 만나서 담판을 지었을까?
홍재현이 1890년에 일본에서 만났던 관헌은 片岡市吉, 片岡平郞이고 1898년에 독도에서 만났던 일본인 어부는 무라카미이다.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도 문제이지만 홍재현의 도일시기에서 나타나는 15년에 걸친 시기의 문제이다.
한 가지 사건이 15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초에 있었던 일본의 도해면허의 날짜 까지 확인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때 시기의 혼란은 근본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담판과정과 내용에 대해 전해오는 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의문이다.
홍재현이 일본 관헌과 담판을 짓고 기념사진 까지 찍었다면 관련 기록이 없을리가 없다.
안용복의 도일관련 기록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과 비교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기사, 수기, 그리고 전해오는 사진을 근거로 상황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추정가능한 시기는 1883년(20세), 1890년(27세), 1896년(33세), 1898년(35세)이고,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홍순칠과 박영희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홍재현이 일본에 건너간 때는 1890년(27세)이고, 만났던 일본 관헌은 片岡市吉, 片岡平郞이다. 하지만 사진설명을 근거로 하면 1896년 33세가 된다.
사진상으로 볼때 20세나 27세라고 보기 어렵다. 33세나 35세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이는 그렇다하더라도 홍재현의 복장이 의문이다.
홍재현은 조업을 위해 독도에 가서 일본인을 만났다. 조업을 위해 의관을 갖춰입고 갈리는 없을 것이다.
홍재현은 독도에서 조업중 일본인을 만났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담판을 지으러 가서 찍은 사진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홍재현의 모습니다.
더 젊고 당당해 보이는 일본인에 비해 홍재현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다.
담판을 지으러 일본에 건너간 사람의 기개와 용기는 보이지 않는다.
15년의 차이가 나는 시기의 혼란, 기념 사진속에 보이는 홍재현의 모습을 볼때 담판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사진은 언제 어디서 왜 찍었을까?
사진속의 일본인은 누구일까?
약관에 불과한 홍재현이 아무나 볼 수 없었던 세종실록을 읽을 수 있었을까?
기념사진까지 찍었는데 관련기록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재현은 과연 일본에 가서 담판을 짓고 왔는가?
만약 홍재현의 도일활동이 사실이고 담판내용을 밝힐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확인되지도 않은 주장을 근거를 제시한다면 일본에 트집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고 우리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다음은 홍재현의 도일활동에 대한 기사이다.
첫 번째 기사는 『선데이서울』기사인데 홍순칠과 박영희의 인터뷰 기사이고 둘째는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이다.
1890년이었다. 홍씨의 할아버지 洪奉悌옹은 어느날 배를 타고 독도에 나갔더니 일본 어부들이 물개잡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어부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길로 배타고 일본에 건너가 독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역설하고 불법어로 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고 돌아왔다. 당시에 일본인과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홍씨는 지금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일본인 片岡市吉, 片岡平郞과 찍은 것인데 그들이 일본의 어떤 관리인지 독도에 관한 어떤 서약을 받았는지에 관해서 너무 어려서 들은 얘기라 기억에 없다고 했다.
『선데이서울』, 1976.5.23-전사에 없는 독도의 미니전쟁
일찍이 읽은바 있는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 등 고서에서 우산도, 지금의 독도임을 짐작케 되었고....다음해(1898년)에 전년보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독도에 바다사자를 잡으러 가셨는데 의외로 그곳에서 일본이 무라카미(村上)란 사람 일행을 만나게 되어 대화해 본즉 그 사람들은 생업으로 바다사자를 잡아 파는 동물상이라고 하였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이 섬은 자고로 우리의 땅인지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섬에 오지 말 것을 얘기하였다. 울릉도에서 같이 간 일행은 바다사자를 잡아 돌려보내고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인이 타고 온 배에 동승 일본으로 같이 가게 되었다. 일본에 가신 할아버지께서는 그 곳 관헌에 울릉도와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산도, 지금의 독도는 한국의 땅인지라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는 금지할 것을 당부하고 일본인이 내주는 배로 울릉도로 돌아오셨다고 내가 어릴 때 여러 번 무용담처럼 말씀하셨다.
『이 땅이 뉘 땅인데』홍순칠, 199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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