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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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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 최경숙씨가 소개하는 최초 독도주민 고 최종덕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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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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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최초주민 고 최종덕 옹이 2008년 명예 신지식인으로 선정된것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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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최초주민 고 최종덕 옹이 2008년 명예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독도최초주민 고 최종덕 옹이 한국신지식협회가 선정한 2008년 명예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한국 신지식협회(회장 최세규)는 지난 1964년부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입도한 후 전복 양식 배양법을 개발하고, 주민등록법상 독도의 최초 주민이자 반평생 독도가 우리땅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데 일생을 바치신 고(故) 최종덕 옹을 명예신지식인으로 위촉한다고 10일 밝혔다.
한국 신지식협회가 선정하는 신지식인은 자신의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유형 무형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사람들중에서 선정된다.
한국 신지식협회는 매년 농업, 임업, 중소기업, 특허, 근로, 교육, 문화예술, 자영업, 공무원 분야 등과 명예신지식인 등을 선정·발표 시상하는데 올해는 올해의 신지식인으로 네손가락 피아니스트인 이희아 씨를 비롯해 신지식인 대상에 6명, 신지식 경영인 대상 7명, 최우수 신지식인상 7명이 선정됐다.
올해 명예 신지식인으로 독도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고 최종덕 옹이 선정됨으로써 그 동안 기억속에서만 존재하던 최 옹의 독도에 대한 사랑을 재삼 확인 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그 동안 명예 신지식으로 선정된 인물은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 등이 수상했으며 올해는 최종덕 옹과 김상근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이 선정됐다.
한편 신지인상 수상식은 오는 15일 서울프라자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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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1925. 5. 1 출생<평양>
1930 울릉도 이주
1964 독도 입도
1965 서도에서 <물골> 발견
물골에 움막집을 짓고 생활
1968 서도에 집터 닦음.<현재 어민숙소>
1969 토담집 짓고 생활.<사공과 해녀들 입도>
1970~1980 전복 양식 배양법 개발, 해산물 채취
1981. 10 독도로 전입(울릉군 울릉읍 도동산 67번지)
1982 물골 샘 방파 공사.
1984 물골로 가는 계단 공사(998계단)
1985 동도와 서도간 유선전화 가설
1987. 9. 23 뇌출혈로 별세
9월 초 태풍으로 파손된 서도의 집과 뱃자리
등의 복구 자재 구입 차 대구를 방문 중 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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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 그리고 아버지 崔鍾德
최경숙
나의 친정 아버지는 강인하지만 순박한 성품의 어부였다. 여느 어부나 다름없이 바다에 나가 전복 해삼 미
역 등 해산물을 따서 생기는 수입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자 어부였다. 적어도 독도에 들어가
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독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1962년 4월 이후 아버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해산물이 풍부한 독도에서 좀 더 쉽고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하였기에 험난한 파도를 무릅쓰고
독도를 드나드셨지만, 일본이 주기적으로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고 망언을 일삼자 독도의 중요성을
인식한 아버지는 차츰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독도 지킴이로서의 사명감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변해가고 있었
다. 아버지가 처음 독도에 발을 디뎠을 때는 동도에 순경(지금의 경찰) 몇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을 뿐,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았다. 생명 유지의 필수인 식수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삶의 터
전으로서 독도에 정착하기 위해 가장 먼서 하신 일이 식수를 찾는 것이었다. 온통 돌산으로 이루어진 독도
에 먹을 수 있는 샘이 있으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나, 아버지는 섬의 구석구석을 뒤진 뒤에 마침내
샘을 발견하셨다. 그리고 그 샘을 ‘물골’이라 이름을 붙였다. 샘물을 발견한 아버지는 조그마한 움막을 지어
서 해녀 둘 사공 세 명과 함께 독도에서의 어부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외딴 섬
독도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파도가 치는 밤이면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
고 한 밤중에도 몇 번씩이나 산으로 올라야만 했다. 장기적 안정적인 독도 생활을 위해서는 왠만한 파도에
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할 공간을 찾아야겠다고 판단하신 아버지는 섬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최상의 자리(지
금의 어민 숙소가 있는 곳)를 발견하셨다. 비록 물골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사람이 생활할 수 있고 배도 올
릴 수 있는 장소로 그만한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토담을 쌓고 슬레이트를 얹어 아담한 삶의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곳에 토담집을 지어 생활을 한 이후로는 무수한 태풍이 몰아쳐도 그 집터에는 파도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샘물이 나오는 물골은 움막의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돌아가서 물을 길
어 와야 했다. 폭풍이 불고 파도가 쳐서 배를 띄울 수 없는 날이면 깎아지른 절벽에 밧줄을 매달아 몸을 의
지하고 물을 길어 왔다. 한편 본격적인 독도 생활이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망치와 쟁이 등 최소한의 공구만
을 가지고 해안에 어선이 닿을 수 있는 선착장을 만드는가 하면 한 계단 한 계단 시멘트를 등에 져 올려 물
골로 가는 계단도 손수 만드셨다. 그런가 하면 산중턱에 수중 창고를 만들어 전복 수정법을 개발하고 특수
어망을 만들고, 집 뒤에는 문어 건조장을 만들어 잡은 문어를 건조한 다음 육지에 내다 팔 수 있도록 하였
다. 어느 정도 삶의 터전으로서 모양새를 갖추어가자 아버지는 식구들을 모두 독도로 데려가 함께 생활하면
서 겨울을 났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기에 이르기까지 날아다니는 새도 둥지를 틀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신 아버지의 불굴의 의지는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명분 없는 도움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70년대 후반 울릉군청에서 독도생활 보조금을 지원하
겠다는 제의를 해온 적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독도는 내가 살아가는 섬이고 또 내 섬에서 어업으로 충분히
살아가는데 무슨 지원금이냐.’고 하시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이에 한국판 ‘로빈슨 크루소’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니 아버지에게 딱 들어맞는 별명이란 생각이 든다. 한편 독도 동도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순경들에게
아버지는 다정한 말벗이었고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해삼이나 문어를 잡아오다가 동도를 지나치면
찬거리로 쓰라며 던져주기도 하며 섬 이야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순
히 말벗이나 되고 싱싱한 해산물을 전해주는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당시 동도와
서도 사이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불의의 사고나 긴급사항이 있을 때 연락할 수 있는 방편이 따로 없다는 것
이다. 이에 아버지는 전화선을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양 섬 사이에 강철선을 설치하고 거기에 삐삐선을 메
달아 두 섬 사이에 통화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배를 타고 가야만 연락할 수 있었던 두 섬에 전화가 개통되던
날 동도의 경찰과 서도의 어민들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최종덕씨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
는 일이었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독도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공사에서 아버지의 손
길이 조금이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동도의 헬리콥터 착륙장 공사, 물탱크 공사, 계단 공사 등 크고
작은 공사마다 아버지는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하셨다. 일본어에 능통하셨던 아버
지는 독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일본 어부들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같은 어부로서 동병상련이었는지
도 모를 일이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거의 물길과 어업에 관한 것으로 서로 도움 될 만한 이야기나 어려움을
나누는 이야기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일본 어부를 대하는 데 변하지 않는 아버지만의 원칙이 있었다. 일본
어선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동도의 경찰들에게 신고를 하여 경계를 하도록 했으며, 친하게 대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토록 독도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나섰던 아버지도 싫어하는 일이 있었다. 독도를 찾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매우 냉소적이셨
다.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한일 관계에 독도가 불거지기만 하면 너도 나도
앞서 독도에 들러 사진을 찍거나 겉치레 인사하는 것을 아주 싫어 하셨다. 80년대 초 일본과의 영토분쟁으
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 땅은 총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야, 특히 독도에는 사람이 살아
야 진정한 우리 땅이야. 내가 여기 이렇게 독도에 살고 있는데 왜 호들갑들이야?"라고 강하게 나무라셨다.
이처럼 독도는 누가 뭐래도 우리 땅이고, 또 우리 땅이기 때문에 독도에 사람이 살아야만 한다는 일관 된 생
각을 가지신 아버지께서는 확실한 독도 주민임을 행정적으로 확정하고자 주민등록지를 독도로 옮기기로 작
정하셨다. 그리하여 1981년도에 정부에 주민등록지를 옮겨 달라는 건의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마침내 「울
릉군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로 주민등록지를 옮김으로써 명실상부한 독도 제1호 주민이 되셨다. 하지만
그토록 독도를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불행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1987년 여름 태풍이 동해를 휩쓸
고 지나갔을 때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생활의 터전은 5평 남짓한 집만 앙상하게 남은 채 모두가 일거에 사
라져 버렸다. 수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
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아버지가 아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모든 것을 돌이켜 놓아야겠다고 생
각하신 아버지는 복구에 필요한 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뭍으로 나오셨다. 자재를 구입하여 화물차에 실어 보
내고 울릉도로 돌아오기 위해 포항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고혈압으로 인
한 뇌출혈이었다. 독도를 위해 할 일이 너무너무 많다며 90세 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
하시던 아버지! “내 집이 있는 독도가 그립구나.”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가셨다. 아무도 살지 않았던 절해고도, 보이는 건 푸른 수평선과 파도와 갈매기뿐인 외로운 섬 독도. 그 섬
을 친구 삼아 살아온 22년의 세월 독도는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고 친구였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이었다.
지금 아버지의 목소리와 웃음은 보이지 않고 물골, 시멘트 계단, 선착장, 문어건조장, 어민 숙소 등에서 아
버지의 땀 냄새만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아버지는 ‘잘있거라 부산항구야’라는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서 즐겨
부르셨다.
아~아~ 잘 있거라 ~ 독도~항~구야~
갈매기도 잘 있고 순경들도 안녕히 ~
온다는 기약 속에 ~ 기다리지만~
기다리는 ~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 헤이~
아아~또 다시 돌아오마 독도~ 항~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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