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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12 13:47
구 소련과 6.25 휴전
 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4,528  
다음 글은
모스크바대학 한국학센터 객원교수로 재직하시고
이 시대의 숨어 있는 독도의병이신
사학 박사  박 종 효교수님이 독도의병대로 보내오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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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소련과 6.25 휴전

6,25로 남북의 38선 경계선이 사라지고 휴전선으로 대치 된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갔다. 이제 남북은 정치적인 체제가 달라 이질적인 문화가 형성되어져 가고 세월이 가면서 휴전선은 마치 영구적인 남북 경계선으로 인식되어 안타깝게도 통일에 대한 한민족의 간절한 소망은 차차 사그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휴전협정은 남북의 체제를 보호하는 조약도 아니며 국토의 단절을 의미하는 영구적인 국경선도 아닌 문자 그대로 휴전선인 것이다.

이와 같은 휴전협정은 소련이 1950년 6. 25 전쟁이 발생한지 꼭 1년이 되어 가면서 1951년 6월 23일 북한이 전쟁의 교착상태에 빠져 소모전 양상을 보이며 전쟁물자 조달이 한계에 도달한 것을 보고 소련 뉴욕 UN 상주 대표 말리끄 를 시켜 라디오로 남북 쌍방이 38선을 경계로 후퇴해 휴전을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었다.

말리끄의 휴전 제안은 당시 전쟁물자를 북한에 지원하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물론 UN을 대표하던 영국과 미국 신문 일부에서도 환영하고 미 국민들 사이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미국 의회(議會)의 보수파인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 코넬리는 6얼 24일 말리끄의 제안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는가 하면 하원에서 영향력이 큰 민주당 의원 맨스필드와 공화당 의원 포터도 휴전안에 찬성하였다.

UN에서는 총회 의장(앤테잠)이 6월 24일 UN 회원국 대표들에게 말리끄의 성명은 매우 중요하며 즉시 소련측 제안을 수용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소련의 휴전제안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소련주재 미국대사 커크는 워싱턴의 지시로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성 그로믜꼬 부 외상을 예방하고 말리끄의 휴전 제안에 대한 진의를 타진하게 되었다.

그로믜꼬는 커크 소련주재 미국대사에게 휴전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군사협상과 교전 쌍방의 대표자 선정에 관한 의견도 말해주었다.

곧 한국의  UN군 사령관 리치웨이 장군은 1951년 6월 30일 라디오로 김일성 인민군 최고사령관에게 휴전회담개최를 제안하면서 미국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일성도 라디오로 리치웨이에게 1951년 7월 1일  중국 의용군 사령관 팽덕회와 공동으로 서명한 회답을 하였다.

휴전 협상에 동의하고 7월 10~15일간에 개성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1951년 7월 3일 리치웨이는 다시 라디오로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처음 회담에 앞서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연락장교 회담을 제안하고 휴전 조건에 대한 협의는 전투행위 중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소련측에서 그로믜꼬가 미국 커크 대사에게 제안한 임시 군사협정(먼저 전투행위중지에 대한 임시합의)을 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자는 안과는 다른 제안이다.

1951년 7월 8일 연락장교 회담이 개성(開城)에서 개최되어 회담장소, 대표자의 식사, 파괴된 도로수선 등의 합의와 대표자 회의순서,첫 회의 시간,신변안전 및 개성회담지역의 중립지대 설치 등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북한 대표로는 소련방 우즈벡스탄의 한 대학의 부학장으로 있다가 광복 이후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에 들어가 전쟁 전에 교육 부상을 역임하였으나 군에서는 복무한 경력이 전혀 없는 남(南)일(一)을 인민군 총 참모장으로 임명하고 수석대표로 지명하였다.

동시에 UN 군측은 수석대표에 미국 해군 중장 테너 죠를 임명하였다.

1951년 7월 10일 양측 대표자의 첫 회담이 있었다.

북한 측에서는 수석 대표인 남일과 중공의용군 대표로 장화 등이 참석하고 남한은 UN군 측에서 수석 대표로 미 해군 중장 테너 죠와 그리고 한국군 1군사령관 백선엽 장군 등이 참석했다.

첫 회담에서 북한 대표와 중국 의용군 대표는 앞서 소련 말리끄가 제안한 3 가지의 안을 내 놓았다.

즉 ''남북 양 진영은 협정을 체결하고 적대적인 전투행위를 중지하며 38선을 군사 분개 선으로 설정하고 정한 기한 내에 양 진영은 철수를 이행해야 하며 양 진영이 철수한 지역은 비 무장지대로 설정해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전투행위를 하지 않는다. 한편 이 지역의 민간인 행정은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속했던 편에 원상회복된다.

그리고 포로 교환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요약해 말하자면 임시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6.25 이전 상황으로 군사 경계선을 원상 복귀하여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며 전쟁 포로 교환협상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북한 측은 수석대표인 남일은 물론 다른 장교들도 협상에 전혀 경험이 없어 북경에서 특 파된 동무가 중국대표 좌석에 앉아 남일을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UN 군측 수석대표 조오는 즉답을 하지 않고 1951년 7월 27일 2차 회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북한측은 38선을 따라 군사분개 선이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38선에서 발생했으니 당연히 38선에서 끝내야 한다는 견해다.

그렇다. 38선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38선을 따라 휴전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만약 1년 전에 북한군이 낙동강 까지 남하했을 때 휴전협정을 원했다면 휴전선으로 38선을 따라 하자고 북한측이 제안 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또 1950년 9월 15일 이후 북한 측 군대는 압록강 지역으로 후퇴해 있어 38선이 다시 군사 분계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한 이후 이제 38선을 따라 휴전선을 설치하자는 주장은 군사적인 현실로나 역사적인 전 예가 없기 때문에 북한측의 주장을 거부한다''고 하였다.

결국 북한 측이 기도한 남한 무력통일은 UN군의 개입으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나 대신 38선은 없어지게 되었다.

북한은 6.25로 남북한 쌍방에 엄청난 민족적 비극만을 남긴 채 구 소련에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청해 다시 전쟁 이전의 38선 군사 분계상태로 돌아가 휴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휴전협정도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현 휴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지금도 남북한 정권은 현실 정치적인 체제를 앞세워 민족의 염원과는 달리 다시 대치상태에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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