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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2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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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효교수님의 꾸릴 열도를 둘러싼 러.일 도서 분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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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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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릴 열도를 둘러싼 러.일의 도서 분쟁에 대하여
역사학 박사 박종효
동북아 역사재단의 한.러 우호발전에 역주행
한국정부의 교육과학부 소속 독도전문 연구기관에서 2007년 9월에 발간된 “영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초국적 협력과 NGO의 기여방안”이란 논문집과 기타 몇몇 서울 중앙 일간지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의 북방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쉽게 그 근거로 1945년 이전에 일본이나 기타 서방 국가에서 발행된 지도에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북방 4개 도서에 북방영토라는 호칭이 어딘가에 표기되어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명칭은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일본에서 발행된 지도에서도 깜차트까 반도 연안에서 일본 북해도 연안까지 1,175키로 미터에 이르는 20여개의 큰 섬과 100개가 넘는 작은 섬을 지시마 열도(千島列島)라고 호칭하였고 서방국가에서 발행된 지도에서는 꾸릴열도로 표기되었다.
꾸릴열도를 둘러싼 러.일의 역사적인 관계와 배경을 알아보기 전에 한국의 교육과학부 도서(島嶼)연구 전문기관에서 이런 엄연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전문 논문집에 일본의 주장을 복창한 것은 냉전시대의 유산인 러시아를 적성국가로 보는 고의성이 있거나 아니면 미.일의 학문적인 예속에서 빚어진 과오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일 꾸릴열도 분쟁은 한국의 독도문제와 더불어 제 2차 대전 이후 발생한 국제조약에서 근원한 것이므로 일본과 독도에 대한 분쟁을 겪고 있는 한국은 그 대응책으로 러시아와 공통의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무시하면서 부당하게 일본 측 주장만을 옹호한 것이다. 대조적으로 러시아 학계는 한국의 독도를 지지하였으나 이런 사실조차 외면하고 특히 서울에서 작년도에 개최한 세계 역사 NGO 대회에서도 러시아를 철저하게 배제시켰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한.러 우호와 협력에 장애가 됨은 물론이요 러.일 도서관계와 한국의 독도문제 연구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이다. 게다가 한.러 어업협정에 따라 한국의 원양어선이, 일본은 고유한 영해를 침범하는 행위라고 심한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조업을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소위 일본의 북방영토에 대한 러.일 분쟁의 원인과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이 급선무 일 것이다.
꾸릴 열도의 아이누 족과 북방 4개 도서
사실 “꾸릴”이란 말은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어원인<꾸루>“즉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란 뜻으로 처음 러시아인을 보고 아이누 족끼리 한말을 러시아 인이 잘 못 이해해 꾸릴 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한 러시아어다.
아이누 족은 언어와 용모가 일본인과 다르며 일찍이 깜차뜨까 반도에서 이주해와 북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꾸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 일부 지역에 걸쳐 살았다.
특히 꾸릴열도는 줄지어 늘어서 있어 북부, 중부, 남부 군도로 구분하는데 남부 군도에 속하는 북해도에 인접해 있는 4개 도서를 일본은 소위 북방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북방영토라는 용어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이 꾸릴과 차별화하기위해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다.
일본이 주장하는 북방영토는 북해도 북방에 위치한 도서인 하보마이, 쉬꼬탄, 꾸나쉬르, 이뚜루프(주: 일본어로도 같으나 러.일 양국어의 특징상 약간씩 발음에 차이가 있어 여기 쓴 도서 명칭은 러시아 명칭을 기본으로 사용하였다. 지명은 아이누족의 언어에서 나온 말이다.)인데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서는 남 꾸릴군도(群島)라고 부른다
남부 꾸릴의 4개 도서의 거주민은 이투루프는 8,000명, 꾸나쉬르는 4,000명, 쉬코탄은 3,000명이나 하보마이 군도에는 주민은 살지 않는다. 민족분포를 보면 아니누 족이 약 5,000명이고 나머지는 러시아인과 러시아내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일본인도 약간 거주한다.
1945년까지 일본인은 3,100세대 17,000명이 거주했었으나 러시아가 점령한 이후 본국으로 다 송환시켰다. 일본 북해도에서 거리는 비오는 날에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꾸나쉬르는 잘 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지금 행정구역은 러시아 연방 사힐린 주에 속해있고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약 5,000명이 주둔하고 있다.
최초 러시아의 꾸릴 지배와 러.일 영토분할 조약
최초 1855년 러.일 통상 및 국경조약 이전의 꾸릴에 대한 러.일의 관계는 서로 주장이 다르나 러시아 측 자료를 보면 러시아가 1654년에 꾸릴열도를발견하고 이이누족을 정복하면서 캄차트까 바로 밑에 위치한 두 개 도서부터 모피 등으로 세금(야사크)을 받기 시작하여 1778-1779년 사이에 바로 마추마이(주:현 북해도의 옛 명칭)일부부터 그 위쪽에 위치한 꾸릴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족 약 1,500명에게 러시아 국적을 취득시키고 에까쩨리나 2세는 칙령으로 국적을 갖은자에게는 전에 받아오던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했다.
1787년 러시아 영토기록에도 소위 일본이 말하는 북방 4개 도서가 러시아 영토에 포함되어 있으며 다만 북해도(주:마추마이)는 남쪽에 일본인 도시가 있어 확실하게 러시아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다.
일본은 확실히 러시아에 비해 북방진출이 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일본도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가 북해도 일부 및 꾸릴열도 지배를 완전히 하지 않고 1년에 한두 번 세금만 징수하며 까자끄 경비병이 주둔하지 않은 틈을 타 아이누족도 일본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1799년부터 북해도, 꾸나쉬르, 이뚜루프 3개 도서에 아이누족을 강제로 굴복시켜 일본인도 이주시키고 경비초소를 세워 러시아인의 출입을 막았다.
이런 일로 1805년 러시아는 꾸릴열도 중 가장 크고 전 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해도 일부와 꾸나쉬르와 이뚜루프 두 도서를 러시아는 다시 일본으로부터 되찾으려고 일본인 거류지에 방화하는 등 일본과 충돌하면서 러.일 관계가 악화되어 러.일은 통상조약을 오랫동안 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충돌을 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기 초에 아이누족이 사는 북해도를 일본에 합병해 버렸다(주:최초의 합병, 다음에 오끼나와, 대만, 한국)
그 후 러시아는 경쟁국으로 생각한 미국이 1853년 5월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일본과 1855년 11월 사할린과 꾸릴 열도에 대한 국경 및 통상조약을 시모다(下田)에서 체결하면서 서로 꾸릴을 자기영토라고 주장하다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일본이 현실적으로 수비대를 배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속히 통상조약을 체결할 목적으로 꾸릴열도 중에서 4개 도서를 일본에 양보하고 그 북쪽에 위치한 꾸릴 열도를 러시아 소유로 하기로 합의하였다.·한편 사할린은 남쪽 일부지역에서만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과같이 미분할 상태로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860년 청국에서 연해주를 양도 받자 아무르강 하구에 위치한 사할린을 중요시하고 1875년 5월 다시 뻬쩨르부르그에서 일본과 국경 조약을 개정하였다. 이 뻬쩨르부르그 조약에서 전 사할린을 러시아가 일본 측으로부터 양보 받는 대신 꾸릴열도 전 도서를 일본 측에 양보하기로 한 것이다.
러.일 전쟁과 러시아 혁명
러.일 전쟁(1904~1905)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분할을 요구해 남 사할린을 러시아에서 빼앗았다. 그리고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패하면서 사회불안이 가중되어 혁명을 촉발시키는 계기로 발전해 1917년 혁명이 발생해 내란에 휩싸이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7만 여명의 병력을 블라지보스또크에 상륙시켜 수년간 극동지방을 침탈하고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까지 살해한 후(최재형 등) 한인촌에도 방화하여 황폐화시켰다. 그리고 영.미 등에 같이 시베리아 영토를 점령해 분할하자고 제안 하였다. 특히 러시아 영토인 북 사할린은 일본 군정을 실시하면서 지명도 일본어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1925년 북경에서 일본과 상호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러.일 양국이 제정 러시아 때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평화조약을 재확인하여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얄타 협정과 포스담 선언
1943년 11월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의 3국 수뇌가 카이로 선언을 한 그날 루즈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에 도착하여 스탈린과 전후 UN의 설립을 협의하고 영국과 미국이 유럽에서 제2 전선을 구축해 소련의 대독전쟁을 조속히 종결한다는데 합의하였다. 다시 3국 수뇌는 끄레미야 반도 얄타에서 1945년 2월에 회동하고 소련은 극동의 참전 대가로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남 사할린과 전 러시아 영토였던 꾸릴 열도를 반환 받는 대신 독일이 항복한 다음 3개월 후에 극동에 참전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1945년 7월 미,영, 중국의 수뇌가 발표한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고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일본의 주권은 4개 도서인 혼슈, 혹가이도, 규슈,시꼬꾸 와 그 밖에 지정한 도서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이때 꾸릴과 사할린도 일본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며 한국의 독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사령부에서 일본정부에 하달한 지령서도 포스담 선언에 기초한 것이다.
소련은 나치 독일이 항복(1945년 5월 9일)한 후 꼭 3개월 만에 8월 9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스탈린은 8월 15일 소련의 점령지역이 명시된 맥아더 1호 명령을 트루먼 대통령으로 부터 통고받고 1945년 8월 16일 보낸 회답에서 맥아더 1호 명령에 동의하나 수십 년간 수시로 일본군이 러시아 영토를 침략해 약탈(주:니꼴라이 2세 황제의 황금 수송열차도 탈취)해갔으니 러시아 국민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감안 일본 북해도 절반을 소련군이 점령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주: 에까제리나 2세 때의 영토 회복의도) 하지만 트루먼은 1945년 8월 18일 스탈린에게 보낸 회신에서 북해도 점령은 맥아더에게 벌써 위임하여 불가능하므로 대신 미국에 소련이 점령할 남부 꾸릴 열도 중 한 도서에 미군 비행장과 군항시설을 요청하였다. 스탈린도 이 회신을 받고 트루먼의 요청를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최초로 남부 꾸릴 군도를 둘러쌓고 미.소 양국 간에 불화가 시작하였다. 그 후 소련은 맥아더 1호 명령으로 전 꾸릴열도를 점령하고 바로 1946년 2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에 편입시켜 사할린 주에 예속시켰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951년 미국의 주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전후 평화 조약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국제회의는 앞서 미,영,불,중,소 5개국 외상이 일본과 전쟁에 참가한 연합국은 전후 "평화조약을 개별적으로 체결 할 수 없으며 연합국 외상은 조약초안을 작성 할 때 외상회의에서 합의하도록 하였었다."
그러나 이즈음 아시아에서는 소련이 배후에서 지원한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점령하고 한국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기타 아시아 국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소위 해방운동이 발생해 미.소 이념대결은 날로 첨예화되어갔다.
미국은 소련과의 이해가 충돌하자 일본과 평화조약을 유리하게 체결하기위해 전쟁 당사국도 아닌 국제회의로 끌고 가면서 소련을 배제시켰다. 그리고 평화조약 초안에서 소련과 체결한 얄타협정은 전시협정으로 무효이므로 남부 사할린과 남부 꾸릴 열도를 일본에 반환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미국은 남태평양의 여러 도서를 UN의 신탁 통치라는 미명하에 실제적으로 점령하고 오끼나와와 센까꾸(댜오이다오=조어(釣魚島)도 일정기간 점령한다고 했다.
이 안을 보고 소련 부 외상 그로믜꼬(주:외상은 비슨스끼)는 직접 샌프란시스코 본 회의에 참석하여 얄타협정과 포츠담 선언의 위반이라고 비난하고 중화민국이 본토를 상실하였으니 UN에서 축출하고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 안전보장 이사국으로 승계시켜 카이로 선언에 따라 대만 등도 중화인민공화국에 귀속시킬 것과 일본에서의 미군철수 등을 요구하였다. 이로서 두 번째 꾸릴 문제로 미.소가 충돌 한 셈이다.
미국은 이렇게 소련이 반발하자, 극동뿐만 아니라 유럽과 기타 지역에서의 소련과 체결한 전 후 영토 분할에 대한 합의가 깨지는 것을 염려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문에서 “일본은 꾸릴 열도와 사할린에 대한 모든 법적 권리와 주권을 포기한다." 고 조약안은 수정하였으나 소속국가는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1951년 9월 8일 48개국과 이와 같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그날 동시에 미일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 수상 요시다가 조약체결 15일 전에 미국에 도착해 초안 작성과정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독도와 꾸릴열도 문제에 로비를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소련은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불공정 조약이라고 하면서 인도 및 사회주의 위성국가들과 함께 평화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말았다.
대신 서명을 하지 않은 소련은 일본과 개별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도서 반환을 요구하는 구실을 얻은 셈이다. 일본국회는 꾸릴과 사힐린이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평화조약을 1951년 10월에 승인하였다. 하지만 이후부터 일본은 북해도에 인접한 4개 도서를 꾸릴열도와 차별화하기위해 북방영토(주:이 전에 행정구역이 북해도에 소속)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스크바 공동선언
일본은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 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전쟁 상황의 종결과 외교 및 영사관계의 재개를 합의하고 소련은 일본의 UN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일체의 전비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화해를 위해 하보마이와 쉬코탄(4개중 가장 작은 도서)두 도서를 일본에 양도(주:흐루스쵸프는 평화조약 체결 선물이라고 했다, 이 두 도서는 쓸모가 적은 도서다)하기로 하였다.
이 소.일 공동선언은 1956년 12월 5일 일본 국회에서 승인 되였으며 소련에서는 동년 12월 8일 최고회의 간부위원회에서 비준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약속한 평화조약 체결을 미루고 다시 4개 도서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원인은 미국이 초안을 작상 할 때 전 꾸릴열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하였는데도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라 4개 도서를 반환 받지 못하면 오끼나와도 반환 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바로 3번째로 미국이 방해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에 미.일 신 방위조약을 다시 체결하여 일본 자위대에 재무장의 기회를 열어주고 미국은 일본에서 군사기지 사용권을 얻었다. 이에 소련은 평화조약 체결 후에 양도하기로 한 2개 도서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면 소련의 턱 밑에 있는 지역이라 직접적인 위협이 되므로 양도를 취소한다고 일본정부에 통고하고 이후부터는 오랫동안 일본과 도서문제에 대한 논의자체를 거부해 버렸다.
경제위기 때 마다 일본 꾸릴 도서문제 제기
그러나 1989년부터 소련 최후 대통령 가르바쵸프가 개혁정책을 시행하면서 경제개발을 위해 전 지도자들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 유연한 정책과 태도를 취했으나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도서문제는 앞으로 협의하자는 선에서 더 발전하지 않았다.
그 후 1993년 정변으로 러시아 연방 초대 대통령이 된 옐친은 소련방 붕괴로 어려워진 경제 회복을 모색하면서 1956년 소.일 모스크바 공동선언 때 약속했던 2개 도서를 일본 측에 양도하고 경제지원의 액수와 태도를 보아 다음 2개 도서를 차후 협의한다는 안을 작성했었으나 이 안은 학계를 중심으로 국회, 군부 그리고 극동 러시아 어민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좌절되고 말았다. 특히 군부에서는 1945년 극동전선에서 전사한 35.000여명에 달하는 희생을 어디에서 되찾느냐는 것이었다.
그 후 전 푸틴 대통령은 2005년 2개 도서의 양도로 일본이 앞으로 도서문제를 더 이상 논의 하지 않는다면 평화조약의 체결을 위해 협상할 뜻이 있다고 하였으나 일본 전 고이즈미 수상이 전 4개 도서의 반환을 요구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푸틴은 도서문제에 대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이제 전략을 달리해 2007년 동경 8개국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극동개발에 기반시설과 유럽과 아시아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 인터넷 선의 부설 및 관광과 생태계 보호 분야에 협력하겠다는 안을 러시아에 제안하였으나 협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일본은 러시아에 차관이나 경제 원조를 지금까지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러시아의 경제파탄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러시아도 가스와 석유 덕분에 외화가 쌓여있다.
최근 메드베데예프 러시아 대통령은 일본이 교과서에 4개 도서를 자국영토로 기재하자 이해 할 수 없는 망동이라고 비난하고, 총리 푸틴은 낙후된 남부 꾸릴을 대대적으로 2012년까지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일본의 요구에 추호도 양보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해산물:연어,계,명태,꽁치,고등어,청어,가자미,나바가 오징어 등. 초목:오리나무, 삼나무, 버드나무, 대나무, 마가목, 오얏나무, 관목 등이며 동물은 불곰, 백곰 그리고 여우 등이 서식한다. 조류: 갈매기 오리, 가마우지, 올빼미 등이 살며 온갖 조류의 산란지다. 활화산이 있어 온천수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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