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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7-17 17:40
독도와 꾸릴열도와 러.일 관계
 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4,823  
다음글은 독도의병들을 위해 모스크바대학교 한국학 교수님을 역임하신
박종효 교수님이 독도의병대에 보내오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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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릴열도와 러.일 관계
           
                                            러.일의 진출.               
                                                                                역사학 박사 박종효
                                           
꾸릴 열도는 러시아 깜차뜨까(Камчатка)반도 연안에서 일본 홋가이도(北海島)연안까지 730마일에 걸쳐 해상 화산폭발로 출현한 30개 이상의 큰 섬과 100개 이상의 무인도로 형성된 열도로서 원주민은 일본인이 아닌 아이누(Ainu) 족이다.

꾸릴은 원주민 아이누 족의 어원<꿀>은 "사람"이란 뜻이었으나 러시아가 1643년경에 처음 발견 할 때 아이누 족이 러시아인을 <처음 보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 말을 했으나 잘 못 이해하여 러시아어 "꾸리찌"(Курить)즉 "담배 피우다"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담배처럼 길다는 뜻에서 유래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어로는 지시마(천도(千島))로 아이누 족의 어원인 <많은 섬>을 뜻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아이누 족은 18세기경에 러시아 깜차뜨까 반도에서 이주해와 주로 홋가이 도를 중심으로 여러 꾸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 일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언어와 용모는 일본인과 전혀 다르며 인종학적으로는 동남아 종족에 속하는데  신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러시아는 1643년에 깜차뜨가와 꾸릴 열도를 발견하고 1705년부터 꾸릴 2개 도서를 시작으로 점차 야사끄(Ясак) (주: 모피가죽 등의 현물세를 받았다)지역을 넓혀 20개 도서로 홋가이도((北海島) 일부까지 확대하여 현물세를 받았다.

그런데 일본이 지금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소위 북방 영토는 홋가이도 북방에 위치한 하보마이(齒舞), 시코단色丹), 구나시리(國後), 이또로후(擇捉) 4개 도서로 러시아에서는 남 꾸릴 열도라고 부르고, 그 외 전 도서를 총칭하여 꾸릴 열도라고 하고 있다.

이 상기 4개 도서의 면적은 전채 꾸릴 열도의 반에 해당하는 약5,000평방 미터에 달하고 러.일 간에 군사전략적인 요충지로 또는 주변에 가스와 각종 어종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러시아가 꾸릴 열도를 발견한 이후 원주민으로부터 모피 등으로 현물세를 받든 시기 보다 더 늦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홋가이도(아이누 족의 거주 지역)를 병합하고 꾸릴 열도에 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최초 사할린과 꾸릴 열도에 대한 러.일 통상 및 영토분할 조약

19세기 중엽 영.미가 중.일과 수교를 하자 러시아도 뒤를 이어 중.일과 수교와 개항 및 영토협상을 위해 해군제독 시종 무관장 뿌쨔찐(Е.В.Путятин)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모함 빨라다(Паллада,주: 화성과 목성간의 소 혹성을 뜻함)호와 3척의 수행함을 극동에 파견하였다.

뿌쨔찐은 일본에 도착하여 추밀원 전권대표를 만나 영토와 수교 협상을 시작하면서 사할린과 꾸릴은 러시아 영토라고 주장하고 먼저 사할린 영토문제를 협의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사할린 여러 곳에 군 초소를 두고 석탄 등 개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사할린 최 남단 아니봐(Анива) 만에 소수의 어민들 밖에 거주하지 않았으나 완강히 사할린 분할을 주장하고 꾸릴 열도 중에 이또로후 섬까지 요구하였다.

뿌쨔찐은 러시아가 꾸릴 열도에 무관심한 틈에 일본이 현실적으로 이또로후 섬에 일본이 국경수비대를 전진 배치시키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이또로후 섬까지(소위 북방 4개 도서)남 꾸릴은 일본에 양보하고 그 북쪽에 위치한 북 꾸릴 열도는 러시아 소유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사할린에서는 러시아인이 사는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쪽 일부 지방은 일본영토로 전과같이 미 분할 상태로 남겨두기로 하였다.

이렇게 합의하여 1855월 11월 7일 뿌쨔띤은 러.일 통상 및 영토조약을 시모다(下田)에서 일본과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는 1860년 청국과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국경이 확정되자 아무르강 하구에 위치한 사할린을 중요시하고 사할린 전채를 소유하고자 시모다 조약을 체결한지 20년이 지난 1875년 5월 7일 다시 뻬쩨르부르그에서 일본과 국경 조약을 개정하였다.

이 뻬쩨르부르그 조약에서 전 사할린을 러시아가 일본 측으로부터 양도 받는 대신 꾸릴 열도 전 18개(주:당시 사람이 거주하든 섬)도서를 일본 측에 양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의 뻬쩨르부르그 조약도 오래가지 못했다.

1904년에 한국문제와 만주문제로 러.일 전쟁(1904~1905)이 발생하여 러시아 함대가 대마도(對馬島) 해전에서 패하고 독도 앞 해상에서 포위되어 항복하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Roosevelt)의 중재로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을 1905년 9월 5일 체결하면서 일본 측 요구대로 러시아는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분할하여 남.북 사할린으로 양분하고 남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해야했다.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한국과 만주를 얻었으나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러시아가 내란에 휩싸이자 이틈을 타 다시 일본은 1918년에 극동 러시아 연해주, 아무르 주, 바이칼 동부 주, 북 사할린 등을 혁명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점령하고 영.미 등에는 전 러시아 시베리아를 같이 정복해 영토를 분할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북 사할린은 일본 군정을 실시하고 지명도 일본어로 개칭하고 블라지보스또끄 등지에 상륙한 7만 여명의 일본군은 극동 여러 지방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러시아인의 재산과 자원의 약탈은 물론 한인 독립운동가 들을 살해하고 한인촌을 황폐화시켰다. 

러시아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쏘비에트 정권은 질서가 안정되자 일본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셨다.

결국 소.일(蘇.日)은 북경(北京)에서 1925년 1월 20일 상호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소.일 양국이 1905년 9월 5일 제정 러시아가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평화조약을 재확인하고 북 사할린을 정복하고 있던 일본군도 철수 시켰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 후에 또 다시 1938년에 만주국(滿洲國)과 한반도 북부 접경지대에 위치한 러시아 연해주 하산(Хасан)을 국경선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트집을 잡아 점령하고 다음에는 1939년에 몽골의 할힌-골(Халхин-голь)에 침입하여 러시아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약탈하려다가 소련군과 몽골 연합군의 반격으로 대패하고 철수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국제정세는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1941년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하자 일본도 소련과 1941년 4월 13일 체결한 중립조약을 위반하고 동맹국(독일 이태리)에 군수품 등을 공급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을 지원하였다.
 
연합국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도서와 영토 박탈 합의

 이렇게 유럽과 아시아에서 대전이 한창인 무렵 1943년 11월 27일 미국 루즈벨트(F.D.Roosevelt)대통령,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총통 그리고 영국의 처칠(L.S.Churchill)수상이 외교 및 군사참모를 대동하여 카이로에서 회동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혹은 탐욕으로 점령한 영토나 태평양상에 있는 도서를 전후 일본으로부터 박탈하기로 선언하였다.

이어서 카이로 선언을 한 그날 바로 루즈벨트와 처칠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수상) 스딸린(И.В.Сталин)과 별도로 회담을 갖기 위해 테헤란에 도착하였다.

3국 수뇌는 1943년 11월 28일에서 12월 1일까지 회동하고 스딸린에게 유럽에 영국과 미국이 앞으로 제2 전선을 구축해 대독전쟁을 조속히 종결한다는데 합의를 하였다.

스딸린은 그 후 얄타(Ялта)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극동의 참전 대가로 1904~1905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남 사할린과 전 러시아 영토였던 꾸릴 열도를 회수 받는다는데 합의하고 독일이 항복 후 3개월 후에 극동에 참전하기로 하였다.

극동에서 전세가 연합국 측에 유리해지면서 1945년 7월 26일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3국 수뇌는 다시 포츠담(Potsdam)에서 회동하고 카이로 선언을 재삼 확인하였으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소련도 곧 이 포츠담 선언에 가담하였다.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와 맥아더 장군 일반명령 1호

소련은 독일이 1945년 5월 8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자 바로 얄타협정에 따라 대일 참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원폭 투하 후 3일이 지나 나가사끼(長崎에)에 2번째 원폭을 투하하는 날 원래 8월말까지 연합국과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으나 곧 일본이 항복 할 것으로 예측하고 조급히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참전한 다음날인 8월 10일 일본은 동경주재 소련대사에게 "천황을 연합국이 주권국가의 천황으로서 권위가 손상되는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에 동의해준다면 포츠담 선언 조건인 무조건항복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었다.

미국에도 일본은 스위스를 통해 이 같은 외교문서가 8월 10일 전달되어 8월 11일 미 국무장관 번스(J.F.Burnes)가 4개국 연합국을 대표해 그에 대한 회답을 보냈었다.

일본은 번스의 회답을 받고 8월 14일 다시 스위스의 중재로 무조건 항복 선언을 미국에 전달하였던 것이다.

소련 수상 스탈린은 8월 14일 점령지역이 명시된 맥아더 1호 명령을 미국 대통령 트루먼(H.S.Truman,루즈벨트의 후임)으로 받았다.

스탈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1945년 8월 16일 보낸 친서에서 수십 년 동안 수시로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하여 약탈당했으니 러시아 인민의 절치부심을 감안 사할린과 꾸릴 열도 이외에 직접 일본 본토 일부인 홋가이도 절반을 소련군이 점령할 수 있도록 동의해달라고 제안하였다.

트루먼은 1945년 8월 18일 스탈린에게 보낸 회신에서 홋가이도 전 지방의 점령은 이미 맥아더에게 위임하여 불가능하며 대신 미국에 전략적으로 필요하니 소련이 점령할 꾸릴 열도 중 한 도서에 미군 비행장과 군항시설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이 회신을 받고 트루먼의 요청도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꾸릴 열도를 두고 미.소 양국의 전략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어 남 사할린과 꾸릴 열도는 소련이 점령한 이후 1946년 2월 2일 소연방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현재는 꾸릴 열도가 러시아연방 사할린 주에 소속 되어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미.일 방위조약( 미.일이 1951년 9월 8일 같은 날 체결)

2차 대전이 종전 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의 대결로 미.소 냉전이 시작 되면서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본토를 내주면서 전에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각국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혁명운동이 발생해 미.소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미국은 날마다 극동에서 북한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세력이 확장되는데 대해 당황하여 그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소련과 중국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높아져갔다.

대신 미국의 점령지인 일본은 전통적으로 2차 대전 이전 제국주의 때부터 반공 정책을 시행해 오고 있었으므로 미.일은 서로 반공에 대한 공감대가 대소 방위 유대관계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제 소련과 얄타에서 체결한 전시협정을 무력화시키고 일본과 전후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패전국 지배를 청산해 이제 일본과 대소 동반자로 전 러.일 전쟁(1904~1905)때 일본에 전비의 대부분을 지원해 러시아를 패전시킨 것과 같이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극동 대리자로 내 세우려는 구상을 하게 되였다.

이와 같은 발상에서 1951년 미국의 주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평화 조약을 위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앞서 1942년 1월 1일 미,영,불,중,소 5개국 외상은 일본과 전쟁에 참가한 연합국은
"평화조약을 개별적으로 체결 할 수 없으며 연합국 외상은 평화조정 준비 작업을 위해 조약 안을 작성 할 때 외상회의에서 합의하도록 하였었다."

그러나 미.소는 반목이 깊게 되어 미국은 소련을 배제하고 평화안을 작성하면서 참전국도 아닌 국가들을 참가시키게 되었다.

게다가 현 중국은 대만정부가 UN의 상임이사국으로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참가 할 수 없었다. 
 
소련은 평화협정에서 남 사힐린과 꾸릴열도가 논의 대상이 된 것을 알고 얄타협정의 위반이라고 비난하다가 후에 토의에 참가하여 서명조건으로 장개석 중화민국이 본토를 상실하였으니 UN에서 축출하고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신 안전보장 이사국을 승계하여 카이로 선언에 따라 대만과 팽호도 등도 중화인민공화국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문제와 일본에서의 미군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자 서명을 거부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소련의 서명거부가 일본에 현 소위 북방영토반환을 주장하게 되는 한 벌 미를 제공한 셈이다.

이러한 미.소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미.영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 우방국은 장개석의 중화민국인 대만을 분리 독립시키고 본토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피 할 수 있었으나 꾸릴 열도는 소련 외상 그로미꼬의 반발로 연합군 사령부의 외교 각서에서 규정한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종전의 조항을 그대로 두게 되었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권과 중립국인 인도는 미국이 주도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불합리하다고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서명을 거부하였지만 1951년 9월 8일 결국 미국의 주도로 48개국이 일본과 평화조약에 서명하여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사실상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소련과 중국이 불참하고 참전과 무관한 대다수 국가들과 평화조약에 서명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당시 소(蘇).일(日) 관계 개선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으며 더욱이 사할린과 꾸릴 열도의 소련 귀속은 미국의 극동방위 핵심지역인 일본에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위와 같은 미국 측의 태도에 소련 측에서는 얄타협정 등을 무시하고 사할린과 꾸릴 열도에 대한 미국의 처사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런 소련의 반발에 미국은 극동뿐만 아니라 유럽과 기타 지역에서의 소련과 체결한 전 후 영토귀속에 대한 합의가 깨지는 것을 염려해 다만 얄타협정에 의거 남 사할린과 전 꾸릴 열도에 대해 "일본은 법적 권리와 주권을 포기한다." 라고 하였으나 소련과 나중에 개별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중 관련조항을 보면 “일본은 꾸릴 열도와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에서 빼앗은 사할린에 대한 모든 법적 권리와 주권을 포기한다." 고 하였다.

이렇게 "사할린과 꾸릴열도는 일본은 법적 권리와 주권을 포기한다." 라는조항을 두고 센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소련을 제외한 다른 48개국과 체결하였지만 미국의 대소 전략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배후에서 그 즉시 일본은 반발하고 나셨다.
   
그런 배경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한 바로 회의장에서 일본 요시다(吉田) 수상의 조약수락 발언을 통해서 들어나기 시작했다.

요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에 그 어떤 별칙이나 압력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일본에 하등의 제한도 없다.

일본 국민에 완전한 주권과 평등 그리고 자유를 주어 이제 국제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복권 되였다.

이 조약은 보복조약이 아니며 화해와 신뢰의 조약이다.

일본대표단은 기꺼이 정의롭고 관대한 이 조약을 수락한다.

"그러나 꾸릴열도와 남 사할린은 소련대표단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다.

일본본토의 하나인 홋가이도의 일부이므로 반드시 반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의 말로 미루어 보아 이미 평화회담직전에 미.일은 꾸릴 도서문제를 두고 장기간 논의했던 것이며 독도문제도 이때 미.소 이념 전 때문에 소련 함대의 태평양 진출을 방해하는 전략 요충지로 고려하여 미국과 어떤 담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 사할린과 꾸릴 열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일본은 법적 권리와 주권을 포기한다는 조항이 있어 국제법상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북방 4개 도서인 남 꾸릴을 자국영토라고 말할 하등의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일본국회는 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1951년 10월에 승인하여 법적 효력이 발생한 후에도 남 꾸릴 도서 반환을 집요하게 소련에 요청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소련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서명을 거부하고 일본과 개별적인 평화조약은 물론 러.일 에 새로운 국경조약이 없으니 최초의 조약에 의해 꾸릴열도 중 소위 북방 4개 도서는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기도하고 또 신조어로 남꾸릴을 일본의 “북방영토”로 꾸릴열도에 소속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소.일 모스크바 통상 수교 재개 선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소련은 개별조약을 체결하기위해1955년 런던에서 소.일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과 통상 및 수교재개를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처음 일본은 소련이 남 사할린과 꾸릴열도를 일본에 반환한다는 조건하에 평화조약을 체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소련 측이 완강히 거부하였다.

일본은 100년 전의 1855년 러.일 시모다  조약에서 북방 4개 도서인 남 꾸릴은 러시아가 일본영토로 인정한 것이니 당연히 양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시모다 조약은 이미 폐기 된지 오래며 시모다 조약 체결 이전에 벌써 러시아 영토로 있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전 꾸릴열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얄타협정에 의해 소련이 전승국으로 점령하고 있는데 일본 이외의 어느 국가도 소련의 점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반박 하였었다.

이윽고 일본은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소(蘇).일(日)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소련은 "전쟁 상황의 종결과 외교 및 영사관계의 재개 그리고 일본의 UN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일체의 전비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양국은 평화조약의 체결을 위한 협상을 계속하고 조약체결 이후에 하보마이와 시코탄 두 도서를 일본에 양도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소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일부 영토를 선물로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소.일 공동 선언은 1956년 12월 5일 일본 국회에서 승인 되였으며 소련에서는 동년 12월 8일 최고회의 간부위원회에서 비준을 받았다.

    소련 미.일 상호 방위조약체결(1960)후  2개 도서 반환 거부

그 후 일본은 평화조약을 미루어 오다가 1960년 신 미.일 상호 방위조약은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에 육.해.공군을 주둔시킬 수 있고 외국과 군사충돌이 있을 경우 일본이 지원 하고 자위대의방위력 강화를 허용하여 미군과 상호 협력할 수 있게  집단 방위체제 구성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오끼나와 와 보닌 등의 일본 영토를 반영구적으로 군사기지로 사용 할 수 있게 되였다.

소련은 이 미.일 상호방위조약은 소련을 적대국가로 여긴 반공군사동맹이므로 반환 예정인 두 개 도서가 바로 코앞에 있어 군사기지로 사용 되면 소련의 국방에 위협이 되므로 양도 해 줄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미.일 상호 방위조약체결 이후 더욱 강력히 소련에 영토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일본은 이전 100년 전 러.일 조약으로 소급해 4개(북방 영토)도서와 남 사할린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소련과 평화조약 체결은 미루면서 1956년 흐루스쵸프(Н.Хрущев)때 소.일 선언에서 밝힌 2개 도서의 양도는 즉시 이행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흐루스쵸프도 일본이 평화조약의 체결을 미루자 즉시 취소 통고를 했었던 것이다.

소련은 국제조약 법에 관한 비엔나 협정 62조 2항과 3항에 "조약 체결 이후 일국이 조약 당시의 조건과 다른 상황이 발생할 경우 조약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거나 연기 또는 부분적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2개 도서 양도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더 이상 일본과 도서문제 자체를 회담의제로 정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소.일은 서로 영토문제는 협의가 없었으나 고르바쵸프(М.С.Горбачев)소련 대통령 때부터 다시 논의가 시작 되였다.

    소연방 최후 대통령 가르바쵸프 와 신생 러시아 공화국의 꾸릴 정책   

고르바쵸프가 개방. 개혁정책을 1989년부터 시행하면서 극동 영토문제에 완강했던 전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유연한 정책과 태도를 취했다.

일본은 고르바쵸프가 1991년 4월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최소한 남 꾸릴을 반환 받을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가르바쵸프는 일본 수상과 회담에서 도서문제에 대하여서는 예상외로 완강했었다.

전 지도자에 비하여 인플레에 시달리며 경제를 회복하고자 일본의 협력을 바라고 유연성을 보였으나 공동성명에서는 1956년 2개 도서 양도합의를 확인하는 것조차 피했다.

다만 양국입장을 고려하여 일본이 주장하는 4개 도서와 평화조약 체결에 관한 모든 문제를 협의하자는 합의에 그쳤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도 오래가지 못하고 1991년 정변의 발생으로 73년 간에 걸친 소련방은 붕괴되고 공산당 정권이 실각 되면서 민주 정의를 표방한 신생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탄생으로 이념을 앞세운 미.소 대결과 긴장은 종식 되였다.

이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회복시키고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옐친(Н.Н.Ельцин) 러시아 연방 대통령은 경재 회생정책을 모색하면서 영토문제로 이해관계에 있는 경제대국인 일본을 떠올렸다.

 일본도 러시아의 국내정책뿐만 아니라 대외 정책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 소련시대 말기부터 다시 시작한 도서문제 타결을 희망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우선 긴박한 경제지원을 바라고 도서문제를 일본의 요구에 따라 협상을 준비 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러시아는 두 개 도서 더하기 알파라는 공식으로 구성하였다.

환언하면 1956년 소.일 공동선언 때 평화조약 체결의 조건으로 약속했던 두 개의 도서인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먼저 양도하고 일본 측의 경제지원의 성의와 태도를 보아 다음 2개 도서문제를 차차 협의한다는 안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뜻밖에 학계를 중심으로 국회, 군부 그리고 극동 러시아 어민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일본과 태평양전쟁 때 약 4만 명의 전사자와 극동 러시아 영토에서 일본이 수년간 약탈해간 재산과 자원의 보상을 어디에서 받느냐는 것이다.

 결국 옐친은 1992년 말에 일본을 방문하여 돈 가방을 받을 계획이었으나 강력한 반대여론에 직면하여 출국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겨우 여론을 진정시키고 1993년에야 일본에 가 옐친과 일본 수상은 1993년10월 13일 동경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서에서 "러.일 양국정부는 과거의 불편한 관계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고 남 꾸릴 도서의 소속 문제를 신중하게 협의했으며 양국은 남 꾸릴 문제의 해결로 속히 평화조약에 대한 협상을 계속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는 의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후 러.일 간에 평화조약 체결협상을 1997년 그리고 1999년에도 계속하면서 2000년까지 체결한
다는데 합의하였으나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여 실패하고 러시아는 2005년부터 일본에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즉" 일본의 북방 4개 도서에 "일본의 광범한 경제적 투자와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의 행정주
권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안이었다.

뿌찐(В.В,Путин)이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이 전과는 달라졌다.

뿌찐은 강력한 러시아를 원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석유와 가스 및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악화 되였던 경제사정도 호전되어 21세기 자원경쟁 시대에 초강국을 추구하며 일본의 도서협상 제의에는 냉담하게 되었다.

이미 1956년 소.일 모스크바 선언으로 가장 중요한 전쟁상태의 종결을 선언하고 수교 통상이 이루어져 통상과 문화교류가 매년 확대되어 평화협정을 사실상 대신하고 있다. 이제 평화조약이 꼭 필요한것은 아니다.

다만 꾸릴 열도를 사이에 두고 소.일 국경 문제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일본은 이미 1963~1981년에 소련과 일련의 어업조약의 체결로 남 꾸릴에 러시아의 법적 관할권을 인정하고 소련 영토임을 확인하게 되어 국경선은 실제적으로 해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제법상 1969년에 제정된 비엔나 국제조약 법 45조는"국가가 해당 국제조약을 동의하는 명백한 표현을 했거나 묵인을 하고 있으면서 해당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할 수 없다" 즉 다시 말하면 한 국가가 국경에 관련된 어업 국제조약을 체결하여 실질적으로 이행하고 인정하면서 해당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할 권한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러시아 국민의 절대 다수도 소위일본이 주장하는 북방영토의 양도를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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