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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22 22:54
러시아 동포들의 독립운동 성금 영수증과 보상약속
 글쓴이 : 독도의병대
조회 : 5,963  
=러시아 동포들의 독립운동 성금 영수증과 보상약속=
                                                      역사학 박사 박종효

러.일 전쟁을 기화로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고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일 평화조약(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곧 바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헌병대와 경찰대를 대동하고 1905년 11월 야밤에 대궐에 난입해 고종(高宗) 황제와 외부대신 박재순(朴齊純)을 협박하고 국새(國璽)를 강탈해 미리 준비한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에 일본인이 임으로 날인하였다는 만행이 알려지자 분노한 러시아 연해주 한인 거주지역에서는 해외에서는 최초로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이 열화같이 일어났다.
이 성금운동은 러시아 이민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진 최재형(뾰틀 세멘오비
치 최)이 앞장서 조직하였는데 연해주 여러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든 한인 촌에서는 하나 같이 일본의 만행에 치를 떨며 고국의 독립투쟁을 위해 너나 없이 앞을 다투어 성금운동에 동참하였다.
  최재형은 일직 9세 때 러시아에 이주해 귀화하고 한국에서 소를 수입해 팔아 상당한 재력과 신망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한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면장을 역임하고 1896년 니꼴라이Ⅱ세 대관식 때는 한인 소수민족 대표로 초청을 받기도 했다. 또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뛰어들어 한인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감독을 맡아 이주 한인사회에서는 명성이 높았었다.
또 이 성금운동을 선도한 최재형 배후에 간도(間島) 관리사로 있다가 러.
일전쟁(1904-1905)때 일본의 한국 침공을 반대해 북한지역에서 약 2,500명의 의병을 모집해 러시아군과 연맹(聯盟)으로 항일투쟁을 한 이범윤(李範允)이 있었다. 그는 1905년 9월 포츠머스 러.일 평화조약으로 러시아군이 북한지역에서 철 수 할 때 어쩔 수 없이 의병 대를 해산시키고 일부 의병대원만 거느리고 러시아에 들어가 이때 (1906) 최재형의 집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범윤과 최재형은 고국의 독립회복을 위해 의병투쟁에 나서기로 뜻을 모으고 최재형의 주도로 전 연해주 거주 한인 촌으로부터 군자금 모금과 총기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으로 1908년 4월에는 수찬지역(Сучансчкий участок) 한인 촌에
서는 7,000루블(주:일화로 약 7,000엔) 노보끼예브스크(Новокиевск)한인 촌에서는 1,800루블이 성금이 모였다. 총기는 수찬지역 한인에게서 8정 그리고 뽀시예트(Посьетский участок) 지역 한인 촌으로부터는 총기 252정과 실탄을 모았다. .(러시아 극동문서 보관소, 남 우수리 경찰서장이 연해주 지사와 국경행정관에게 1909년 1월 13일 보낸 경찰조서기록 РГИА ДВ, Ф.1 Оп3,Д.1160.Л.206.),
이와 같은 성금과 무기헌납이 바로 무력 항일독립투쟁의 기반이 되었는데
그 성금과 무기관리는 이범윤이 하였다
러시아 한인 이주민는 사실 1860년 이후 소위 청국(淸國)의 봉금지대(封
禁地帶)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 되면서 러시아는 연해주(沿海州) 우수리 지방의 황무지(荒蕪地)를 개척하려고 이주민을 환영하자 수년간 흉년으로 굶주림에 지쳐 새 땅을 찾아 겨우 살림도구 몇 가지만 챙겨 들고 조국의 산하에
묻어있는 조상을 못 잊어 멀리 가지 못하고 두만강 가까운 곳에 옹기 종기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 그들이라 너나 할 것 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날 품팔이로 받은 품삯까지 성금으로 낸 것이다. 그야말로 조상이 잠든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어 성금액수로 평가 할 수 없는 조상에 대한 효도와 애국정신이 묻은 정성이었던 것이다.
특히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한일협약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하자 그 때부터 독립투쟁 단체들이 다시 분발하고 결집해 한인 촌에서 받은 성금에 꼭 창의소의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행해주면서 조국이 독립된 이후에 보상해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1910년 7월 8일 두만강 건너 암밤비에서 150여명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모여 창의 대회를 개최하였다.(주: 창의소(倡義所)는 이미 이전에 설립하였으나 공식적인 대회는 1910년이었다) 
이 창의소(倡義所=국난의 의병) 의장에는 이범윤이 되었으며 8도 의병대장에는 단발령 때 3,000명의 의병대를 국내에서 거느렸던 유학자 유인석(柳麟錫), 그리고 1907년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李相卨), 또 항일 투사 홍범도(洪範圖), 이범석, 김좌두, 안한주, 이기풍 등이 지도위원으로 선임 되였다. 이로서 연해주에 흩어져 활동하던 여러 항일 애국단체가 단일화된 셈이다.
.이들은 전국적인 투쟁을 계획하고 8도 의병대장에 유인석을 추대하여 유림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일시에 항일봉기를 위한 조직을 하는 한편 두만강 인접지역에서는 항일 빨치산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독립투쟁의 발원지가 바로 러시아 극동 한인 촌이었으며
애국운동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독립 된지도 어언 60년이 넘었지만 러시아 한인 촌은 간 곳이 없고 이제 그들의 후손은 많은 풍상을 겪은 끝에 전 소련방 국가내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그리고 독립되면 보상해 주겠다는 약속도 기억도 조국은 다 잊어버렸다. 다만 그 성금 영수증이 남아있어 우리에게 당시 러시아 한인들의 조국애를 추념(追念)하게 하고 있다.
 
       
 
    영수증 1) 홍범도 영수증, 극동문서 보관소 Ф.1, ОП.1.73,Л.69
            2) 최치원 영수증, 극동문서 보관소 Ф.1 Оп.1,Д.73,Л.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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